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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ug 04. 2023

자각되지 않는 차별

앙투안 그리즈만

지난주엔 스페인 축구리그 프리메라리가 소속 빅 클럽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 마드리드)가 내한했었다. 프리 시즌을 맞아 쿠팡 플레이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고, K리그 올스타 및 역시 쿠팡의 초청으로 내한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와 경기를 치렀다. AT는 많은 미담을 남겼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정예 멤버를 가동해 필드에 비지땀을 쏟으며 달렸고, 경기장 밖에서도 훌륭한 매너와 성의 있는 태도를 보였다. 간판선수 앙투안 그리즈만은 단연 돋보였다. 자상한 팬 서비스와 정중한 인터뷰는 물론, 경기장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환호성에 답례하고 관중과 어울려 파도타기 응원까지 지휘했다. 그리즈만은 지금껏 내한한 해외 선수 중 손에 꼽힐 모습으로 호평받았고 ‘우리즈만’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런 그리즈만에겐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 4년 전 바르셀로나 소속일 때 일본 투어에서 있었던 인종 차별 논란이다. 호텔 룸에 들어온 현지 직원 옆에서 팀 동료 우스만 뎀벨레와 함께 인종적 비하의 혐의가 있는 모욕적 언사를 프랑스 어로 떠들었다. 사실 문제가 된 발언들은 뎀벨레가 했고 그리즈만은 웃으며 듣고 있는 정도였지만, 그 역시 다른 장소에서 동양인의 언어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는 행동을 한 영상이 남아 있다. 이 일은 뒤늦게 폭로돼 바르셀로나의 스폰서를 맡고 있던 라쿠텐이 항의했었고, 그리즈만과 뎀벨레는 사과문을 썼다. 그리즈만은 ‘나는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해 왔다’며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한편 일본인들이 느낀 불쾌감에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 말은 사과라기보다 항변처럼 들린다. “나는 잘못한 게 없지만 네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라는 사과 아닌 사과의 예시문 같다. 하지만 차별에 반대해 왔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는 실제로 사회적 차별에 반대하는 행적을 남겼다. 게이 잡지 커버 모델을 맡아 동성애 혐오에 반대하는 인터뷰를 했고, 이주민 출신이 많은 프랑스 대표 팀에서 흑인 동료들과 절친한 교분을 맺고 있다. 중국 정부의 위구르 족 탄압에 항의하며 화웨이와의 개인 스폰 계약을 해지하기까지 했다. 소수자 차별에 대한 세계인들 의식 수준을 그래프로 그려 본다면 그리즈만은 평균치 이상의 집단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왜 그런 인물이 동양인에 대해선 동료의 차별적 발언을 제지하지 않고 ‘칭챙총’ 같은 행위를 했는가. 비판받아 당연하다. 다만 이를 위선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맥락을 짚어 보는 길도 있다.                  

   

누군가 타자를 향해 차별적 행위를 할 때, 자신이 차별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어떤 표현이 혐오 표현인지 아닌지 발화자와 비판자들 사이 논쟁이 붙는 경우는 흔하다.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는 블랙 페이스는 흑인에 대한 대표적 혐오 표현이지만, 몇 년 전 한 국내 고교 학생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찍은 졸업 사진이 논란이 됐을 때 그들의 목적은 흑인을 경멸하는 것이었을까? 비아시아 지역에는 눈을 찢는 포즈가 있고 동양인에 대한 전형적 혐오 표현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인종차별이란 자각 없이 수행될 때도 있다. 박지성은 해외 선수들이 인종 차별에 무지하다고 전하며 친한 동료로 유명한 테베즈가 자신을 위해 눈을 찢는 골 세리머니를 하겠다 제안한 적이 있다고 밝혔었다.             

  

물론 악의 없는 차별도 차별이다. 악의가 없으면 모른 체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악의가 없다는 것은 자각도 하지 못할 만큼 차별에 관해 무지하거나 사람들 내면에 타자를 대상화하는 태도가 무의식 중 스며들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다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차별을 목적의식화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결론이 늘 도출될 수는 없다. 이건 피부색을 떠나 성별과 성적 지향, 장애 등 여타 사회적 정체성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병신’은 장애인들이 시정을 요구하는 장애인 멸칭이지만 비장애인끼리의 대화에서 서로를 향해 오가고 미디어에서 평범한 욕설처럼 쓰이곤 한다. 이런 케이스들은 단순히 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하며 비난하는 것으로 해소되긴 어렵고 현실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자각 없는 차별은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 행위의 의미와 그것을 겪는 타자의 입장을 알려 주는 것으로 자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의 의식과 행동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거쳐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적 표현도 세계적으로 문제의식이 많이 퍼진 상태다. 그렇게 보면 그리즈만이 정말로 악의가 없었는지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그가 한국에서 보여준 건 피부색에 관계없이 팬들에게 최선의 존중을 바치는 태도였다. 어쩌면 과거의 논란을 의식해 더욱 신경을 쓴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게 문제가 될 순 없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고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을 옮겨 나간다면 오히려 평가받아 마땅하다. 타인을 차별주의자라 몰고 가는 것도 고압적 태도일 수 있지만, 사람들 저마다가 갖춰야 하는 미덕과 의무 역시 타인에게 귀를 열고 삶의 페이지를 돌아보며 윤리적 오탈자가 있다면 고쳐 쓰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리즈만 논란은 ‘에펨 코리아’ 같은 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오래전부터 질타당해 왔다. 그 커뮤니티에서 ‘목화밭 노예’처럼 자각이 넘쳐 나는 혐오의 조어가 흑인 선수들을 부르는 사투리가 된 것을 떠올리면 팬덤 싸움의 연장선이나 누군가를 마음껏 비난할 명분이 굴러들어 온 것 이상의 의미를 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별이 나쁜 건 누구도 정체성만으로 모욕과 불이익을 당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보편적 원칙을 머리에 새기지 않는 다면 차별에 대한 갖가지 논의와 논란은 왜곡되고야 만다. 저 커뮤니티에서 ‘우리즈만’을 칭송하기 위해 “그리즈만은 일본만 싫어하는 반일이다” 같은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것도 차별에 관한 논란을 또 다른 혐오로 정당화하는 어긋난 사고방식이란 건 설명할 필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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