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잼버리 폐영식 케이팝 콘서트
새만금 잼버리를 요약하기 위해 ‘파행’ 이외에는 달리 찾을 만한 단어가 없을 것 같다. 이 대회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치러졌는지는 숱하게 고발됐다. 그늘도 없는 한증막 같은 캠프장에서 온열환자가 속출하고 가장 많은 참가자를 보낸 영국에 이어 미국이 철수한 시점에서 이 대회의 서까래는 무너졌다. 남은 참가자들이 전국에 흩어져 ‘한국 체험’으로 활동을 전환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대규모 캠핑을 통해 스카우트 활동을 체험한다는 잼버리 대회의 목적은 일찌감치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선적인 문제는 새만금이 캠핑장으로 부적합하단 사실에 있겠지만, 새만금이 개최지로 결정되고 7년이란 준비 기간이 있었다.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런 낭패가 닥쳐오고야 만 것은 정부 차원에서 잼버리란 행사를 무겁게 보지 않았고 대회 유치로 인한 국가 홍보와 부대 효과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게 한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월드컵과 올림픽도 치른 나라에서 청소년들 수만 명 정도가 모이는 행사를 치러낼 역량이 부족할 수가 없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국가 역량이 총 투입되는 단기적 이벤트에는 강한 저력을 발휘했지만, 정부와 사회가 굴러가는 일상성에는 여러 폐단이 녹아있고 장기적 비전 부재가 비판받고는 한다. 새만금 잼버리는 실상이 알려지기 전 까지는 국내에서도 주목받지 않았고 어떤 무게감을 갖고 준비 과정이 감시받은 행사는 아니었다. 정부 행정과 사회 운영상의 일상적 폐단들이 조용하게 작용하며 대회 운영에 얽힌 난장판을 빚어낸 것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선 그동안 치른 그 어떤 규모 있는 국제 행사보다 사회 현실을 농밀하게 담고 있다. 개최지 선정 과정부터 대회를 치르기까지,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던 걸 봐도 특정 정권이나 행정 부서의 책임을 넘어 이 사회 보편성이 투영된 현실이라고 봐야 한다. 정치적 치적을 위한 전시 행정, 안전 불감증, 비상사태 시 국가 역할 부재 등 새만금 캠프장에서 드러난 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부른 아주 낯익은 광경의 일부다.
이 와중에 불려 나온 것이 케이팝이다. 윤석열 정부는 정부의 실패를 민관에 이관하면서 수습하는 길을 택했다. 각지의 민간 주체들이 숙식과 잼버리를 대신할 활동을 제공하고,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로자들이 차출돼 뒤처리에 투입됐다. 그리고 6일로 예정돼 있던 케이팝 콘서트를 폐영식이 열리는 11일로 미루고 장소를 서울로 옮겨서 규모를 키웠다.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의 힘’으로 파행을 윤색하겠다는 모양새인데, 무려 7년 동안이나 준비가 방기 된 대회를 고작 두 시간짜리 공연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현실을 너무나 가볍게 보는 것이다. 이 상황은 한국의 국수주의가 ‘케이 컬처’를 소비해 온 병폐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케이팝과 <오징어 게임>, <기생충>은 지구적 유명세를 얻었고 한국이란 국명과 나란히 거론되며 국가 브랜드에 무언가 보태는 효과를 거두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것이 국격이나 국력 자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 문화 산업의 가장 높다란 일각이지만 국가 체제와 사회 구조를 대표하지는 못한다. BTS가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한국의 사회상도 그만큼 우뚝한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오히려 사회의 내밀한 현실에는 위기와 악습이 도사리고 있고, 그 시스템으로 준비된 잼버리의 파행을 보아도 명확하다. ‘케이 컬처’를 향한 자화자찬은 현실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는 마취제이자 국격에 대한 환상이 상영되는 극장으로서 국가적 자기 인식의 객관화를 왜곡하는 ‘국뽕’이다. 말하자면, 케이팝이 가리고 있던 것이 새만금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현실이었고, 정부는 자신들이 책임지지 못한 현실을 문화 산업에 떠넘기려 한다.
콘서트에 섭외된 가수들 면면을 보면 전 세계 청소년들이 이름을 알고 열광할 만큼, 나아가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 열흘간 맺힌 땀띠를 잊어버릴 만큼 글로벌한 스타는 없다. 케이팝에서 그런 위치에 있는 가수는 많아야 두 팀이고 그들조차 그 정도는 아닐 수도 있다. 잼버리 폐영식을 콘서트 장으로 바꾼 건 주객전도이며 출연진도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 대회 참가자들이 모두 케이팝의 팬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텐데, 처음 보는 가수들이 춤추는 모습을 두 시간이나 지켜보는 건 긴 여정에 지친 상태에 피로감을 더할 수도 있다. 이 나라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잼버리 대회의 의의와 참가자들의 처지를 헤아리는 일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회야 어떤 꼴이 났건 세계 속의 케이팝을 떠먹여 주기만 하면 만사형통일 거라 믿을 만큼 순진하고 무지할뿐더러 대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그림을 연출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새만금 잼버리에서 케이팝이 뒤늦게 소환된 방식은 이 나라의 무엇이 어떻게 뒤바뀌어 있는지 알려주는 소극이다. 케이팝 공연은 처음엔 잼버리 일정 중간에 치르는 대회의 일부일 뿐이었지만 급기야 정부의 실패, 국격의 훼손을 구제할 책임을 지고 등판하는 구원 투수가 됐다. ‘케이 컬처’는 한국이란 나라보다 큰 존재처럼 호출되며 상상적인 국가 위상을 이룬다. 이처럼 실체가 어긋난 현실 인식은 필연적으로 오판을 부르며 더 큰 실패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대회 파행에 대한 비판과 직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상암에서 울려 퍼질 댄스곡들은 문화의 위세로 치장하지 못하는 정부의 맨 얼굴을 고백하는 공허한 소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