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Love wins all> MV
“Love wins all” MV는 기이한 인상이 들만큼 낡았다. 만듦새가 아니라 감수성이 촌스럽다. 이토록 장애를 새하얗게 대상화한 영상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가수들이 직접 장애인을 연기하고 분장하는 발상부터가 범상하지 않다). ‘사랑’의 환상을 현현시키는 캠코더로 보면 장애인들은 장애가 없는 '정상인'의 모습으로 행복해한다. MV에서 재현되는 장애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이분법의 뿌리 깊은 경계 위에서 그려진다. 그런 시선을 뒤집으면 장애를 그 상태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맞닿은 결핍의 상태로 바라보는 관성이 도사리고 있다.
MV에서 뷔와 아이유는 천진하고 무구하고 무력하고 가련해 보인다. 비록 그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묘사돼 있더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애를 굽어 살피듯 대상화하고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낭만화하는 묘사다. 장애에 대한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모습은 이십 세기 이후 발전하고 정립된 소수자 담론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이 MV의 "가난한 상상력"이 굉장히 오래전, 흡사 팔구십 년 대 한국 방송에서 만들었을 법한 캠페인 영상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문제는 장애에 대한 낡은 관념을 전시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대상화된 장애의 특성이 창작자의 영감을 표현하고 겉모습을 꾸미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한편 그러한 태도가 무분별하게 확장된다. “Love wins all” MV는 물론, 그로 대표되는 앨범 기획 자체가 혼란과 모순의 균열을 드러낸다. 수화를 '사랑스러운 손짓', 시각 장애를 '오드 아이'로 표현한 건 장애에 관한 표상을 이쁘고 트렌디한 할로윈 코스튬처럼 걸쳐 입는 태도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뷔를 보살피는 아이유의 모습은 종교적 성녀 이미지가 재현된 전형적 버전이다. 여성성과 모성의 등치, 여성성에 대한 성속 이분법은 여성혐오, Misogyny란 개념의 관습적 토대를 이룬다.
혐오를 구성하는 태도는 나의 관념대로 타자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대상화다. 무려 "대혐오의 시대"에 저항한다는 선언 아래, 여성·장애인·성소수자를 막론한 온갖 소수자가 대상화되고 그들의 표상이 전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왜 이런 혼란이 일어난 건지 짚어 보면 단순하게 혐오란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을 외롭게 믿는 나,를 향한 자기애와 자기 연민을 명암의 대비 효과로 강조해 주는 암막 같은 배경화면으로서 '대혐오의 시대'가 거창하게 언급된 것뿐이다.
“Love wins all” MV를 보면 케이팝 뮤직 비디오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케이팝은 한국에서 가장 글로벌한 문화 산업이다. 한국보다 앞 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 정치적 올바름에 친화적인 산업으로 발달해 왔다. 여성과 유색인종, 성소수자 등의 소수자 그룹이 케이팝 해외 팬덤의 주요 집단이란 사실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선한 영향력” 같은 낯 간지러운 말이 케이팝을 이르는 수식어로 통용돼 왔다. 케이팝을 대표하는 그룹인 방탄소년단의 인기 멤버가 참여한 MV의 윤리적 상태, 소수자 의제에 관한 인식 수준이 이 지경이라는 건 납득하기 힘든 결과다. 이 상황은 가수 섭외에 응한 하이브 측의 정치문화적 감수성과 판단 기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Love wins all”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의 논의다. 영향력 있는 창작자가 우리 시대의 혐오 같은 사회적 의제, 누군가의 실존을 좌우하는 문제를 다루겠다면, 이것보다는 겸손하고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야 한다. 그건 세상의 인습에 편승하는 문화 상품이 이 사회 가치관을 한층 더 뒤틀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일이고, 케이팝 산업 관계자들의 뇌리에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되먹임 하는 일이다. 어느덧 서른 살이 넘어 아티스트의 자의식을 강하게 내세우는 아이유를 한 명의 창작자로서 엄격하게 평가하고 그럼으로써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