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들 ‘Super Lady’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컴백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아이들은 지난달 29일 두 번째 정규 앨범 ‘2’를 발표했다. 앨범의 면모는 파격적이고 웅장하다. 선 공개곡 ‘Wife’는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가사가 화제와 논란이 됐다. 타이틀 곡 ‘Super Lady’의 MV는 거대 스테이지를 무대로 백 여 명에 이르는 댄서가 동원됐는데, 지난 타이틀 곡들의 네 배가 넘는 제작비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데뷔 칠 년 차를 맞았다. 일반적인 아이돌 계약 기간을 다 채운 숫자다. 이 년 만에 발표한 정규 앨범에서 그에 걸맞은 의욕을 담아 이정표를 세우려 한 포부가 엿 보인다. 상업적으로도 새로운 고지에 올랐다. 이번 앨범 초동 판매고는 153만 장이다. 전작을 40만 장 뛰어넘은 자체 최고 기록이다. 최근 케이팝 그룹들의 초동 판매고가 대부분 하락하는 흐름을 거스르고 세운 기록이기에 더욱 주목할만하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기존 행로의 끝간 곳에 와 있고 케이팝 산업 안 편에서 바깥을 향해 경계를 넘어다보고 있다.
아이들의 커리어는 2022년 ‘TOMBOY’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까지 자작곡으로 활동하는 실력파 그룹의 입지에 초동 십만 장 정도의 상업성을 지녔었다면, ‘TOMBOY’가 히트한 후 다음 앨범의 ‘Nxde’가 흥행을 이어가고 초동 판매고가 67만 장으로 폭등하며 그룹 위상이 재고됐다. 정말로 흥미로운 건 상업적 스텝 업이 음악적 콘셉트 및 메시지의 진화와 결부하여 이뤄졌고 자신들의 서사를 써 나가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데뷔 후부터 이른바 걸크러시 스타일을 지향해 왔다. 걸크러시는 주체적 여성상이란 테마로 표현되지만, 아이들 역시 다른 그룹들처럼 그 테마를 스타일과 애티튜드 혹은 사운드의 양식으로 표현하는 데 머물렀다. ‘TOMBOY’는 전환점을 열었다. 당당한 여성상을 막연하게 전시하는 것을 넘어 여성의 주체성과 사회적 통념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며 콘셉트 안에 구체적 내용물을 채워 넣었다. ‘TOMBOY’에선 성별 고정관념의 경계를 횡단하는 주체를 자임했고, ‘Nxde’에선 메릴린 먼로를 불러와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비판하고 풍자했다. '퀸카'는 여성으로서 자기애에 탐닉하고 다른 여성들을 향해 고취하는 노래다.
‘TOMBOY’와 ‘Nxde’에서 서로 다른 젠더적 의제가 순차적으로 제기됐다면 ‘Super Lady’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선언문이다. 자신들의 성별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단순 명쾌한 이름(Super Lady)으로 스스로를 부른다. 강한 여성, 진취적 여성을 말하는 노래가 케이팝 신에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요즘엔 널려있다. ‘Super Lady’가 변별되는 지점은 그 자신의 성별을 넘어 남성의 대립항으로서 여성의 좌표를 입 밖에 꺼내 뚜렷이 발음한다는 점이다. 그 많은 아이돌들의 걸크러시가 특정한 성별의 현실을 말하는 ‘여성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젠더적 자의식을 소거한 ‘보편적 주체로서의 여성’을 안전하게 재현하는 경향과 구분된다. "Boy, boy, boy 거기 비켜 어서 / 우린 love, love, love 따위 하긴 바빠 / 여긴 war, war, war 자비 따윈 없어" 같은 가사는 깊이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순 없지만, 혐오의 대안으로 사랑과 화해 같은 허망한 소리를 들먹이는 다른 케이팝 노래들의 관점을 명확하게 거절한다.
“Mama said 넌 언젠가 세상을 망칠 악” 같은 구절은 비록 짧게 지나가지만 모성의 역할로 대물림되는 여성의 객체적 지위를 거부하고 세상에 항명하는 자의식이 천명된다. 'Super Lady'의 Super Lady는 전작들이 제출한 성정치적 메시지를 거치며 탄생한 여성-주체이자, 구체적 지향점과 현실에 대한 긴장관계로 성립하는 정치적 주체다. 사회적 메시지가 갈등의 소지 없는 도덕적 미사여구나 뜬구름 잡는 보편적 이념을 통해 전유되는 케이팝 신에서 마침내 등장한 여성주의적 주체의 자기 호명이다.
아이들의 족적은 여자 아이돌이란 존재를 구획하는 경계는 물론 케이팝 신의 한계선을 넘나들며 지우고 있다. 논란에 오른 ‘Wife’가 그렇다. 이 노래는 단순히 19금 노래가 아니다. 가사는 외설적이지만 편곡은 장난스럽다. 몸을 노출하는 퍼포 의상 대신 펑퍼짐한 옷으로 몸을 덮었다. 자신들이 성욕의 대상으로 전시되는 것을 차단하고, 노래의 주인으로서 삶의 한 스펙트럼을 이루는 성애의 욕구를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연출이다. 지금껏 케이팝 여자 아이돌은 ‘섹시 댄스’나 ‘꿀벅지’처럼 욕망의 대상으로 상품화된 적은 많아도 성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분명한 언어로 밝힌 적은 없었다. 여자 아이돌의 금기를 건드리며 표현 범위를 넓히고 주체성이 확장된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아이들이 일궈 낸 서사다. 걸크러시는 힙합의 자기 과시와 자수성가 문법을 가져와 성별을 바꾼 장르다. 아이들은 중소 기획사 큐브에 소속된 그룹으로서 데뷔 5년 차에 이르러 대형 기획사 ‘4세대’ 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업적 성공을 이뤘다. 대형 프로모션과 수백억 어치 제작비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장르적 서사를 현실화했다. 이 성취는 성정치적 주체로의 전환이라는 여성주의적 서사와도 맞물려 일어났고, 그 전환을 통해 이뤄 낸 결실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노래의 상업적 포텐셜이 당당한 메시지와 함께 빚어낸 케이팝 역사의 새로운 전범으로 기록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