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진요, 티아라 '왕따' 사태, <무한도전> 슈퍼 7 콘서트
한국 사회는 구성원들의 도덕적 자존감이 낮은 사회다. 연일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 비리와 실언, 각종 사건사고와 잔혹한 범죄, 분명 대다수 시민의 심증을 획득하고도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정치적 미제사건들. 이런 나쁜 소식Bad News들은 우리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의 리듬감을 절로 끌어낸다. 심지어 기백 년 넘도록 전승되는 친일파 청산의 숙원은 대한민국이 시작부터 잘못된 나라라는 비분강개를 자아낸다. 이른바 정의의 부재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에 대한 열망이 그리도 뜨거운 것 또한 우리에겐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단 인식의 증거일 게다. 그렇다면, 이런 결핍을 품은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어떻게 ‘정의’를 채워 넣으려 하냐가 문제다.
한국은 연예계 구설수나 연예인들 행적이 사회적 논란, 심지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비화 되는 곳이다. 이런 종류의 사태는 반드시 거대한 여론의 흐름이 추동한다. 대부분의 사회적 쟁점을 둘러싼 격론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하기 마련이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대중의 이해관계와 옷 한 자락 실키지 않는 연예가 뉴스에 여론이 이토록 뜨겁게 대거리한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하다. 예컨대, 퇴출이란 판결로 치달으며 포털 사이트를 달군 사건들을 떠올려 보라. ‘공정한’ 경쟁의 룰을 배반하여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나가수 PD, 소싯적 고국을 비방한 일기가 발각돼 말 그대로 추방당한 옛 2PM 멤버 박재범. 〈연예가 중계〉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어째서 번번이 공론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걸까. 해답은 영역 간 ‘전이’와 공분의 ‘투사’다. 그 드라마틱한 사례로 과거에 있었던 타진요 사건, 티아라 사태, 〈무한도전〉 ‘슈퍼 7 콘서트’를 들 수 있다. 병든 사회의 증상 혹은 징후의 연쇄.
타블로 학력 위조 의혹 사건은 이 자리에서 모두 다룰 수 없을 만큼 여러 겹의 함의를 지닌다. 여기서 짚어야 할 건, 의혹 제기 양상 및 MBC 스페셜 방송 이전과 이후로 나뉜 여론의 반응이다. 발단은 2007년 신정아 사건이다.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사회 저명인사들과 연예인들의 학력 위조 논란이 연쇄적으로 제기됐다. 타블로의 스탠포드 졸업장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타블로는 의심을 일축했다. 하지만 의혹은 쌓여갔고 임계점을 넘어 2010년 5월 <타진요>와 <상진세> 카페가 개설됐다. 많은 누리꾼은 점점 더 타블로 학력의 진위에 귀추를 모았다. 그리고 급기야 의심하기 시작했다. 타블로는 자신을 방어하려 했다. 학력 인증서, 성적 증명서, 스탠포드 대학 영문과 토비아스 울프 교수의 확인서. 하나씩 증거를 제시했고, 사람들은 하나씩 부정했다. 타진요가 타블로에게 원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건 오히려 ‘거짓’이었다. 어떻게든 증명 서류들에서 지극히 미세한 징후까지 찾아내며 허위라고 입증하려 했다. 타진요는 온갖 예능프로 출연 영상을 편집하며 타블로란 존재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외쳤다. 타블로의 삶은 파괴돼 갔다.
여기서 포착할 시사점은 두 가지다. 이들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유죄를 확증지은 상태였다. 이것은 연예인을 심판하는 여론에 사실상 자정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온라인에서 여론이 들끓을 때면 항상 전개되는 공식이 있다. 여론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할 때쯤, 과녁이 된 연예인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결국 다수의 목소리에 제압당하고, 여론은 끝장을 보고서야 질주를 멈춘다. 정념을 분출한 후 뒤늦게 자성하며 자신이 속했던 여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사태가 진행되는 내내 방관하거나 의혹 제기에 가담했던 누리꾼들이 의혹의 핵심을 일소한 MBC 스페셜 방송을 기점으로 일제히 타진요를 비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미심장하게도, 타진요 사태는 타블로에서 그치지 않고 학벌과 위장전입 같은 정치사회적 사안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들은 타블로를 무슨 악의 근원이나 본보기처럼 지목하고 정해진 결론을 얻어 내려 주리를 틀었다. “네 학벌로 쌓은 성공이 저 더러운 정치인들처럼 거짓의 소산이란 걸 실토하란 말이다.” 타진요 잔당들이 ‘검은 머리 외국인’과 정부의 ‘다문화정책’ 앞에 타블로를 세워두고 다트를 던지고 있단 점은 일목요연하다. 정치사회적 부패에 대한 열패감이 예능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런 전이가 훨씬 극적으로 전개된 사건이 있다. 2012년 8월에 터진 티아라 ‘왕따’ 사태다.
2012년 8월, 걸그룹 티아라 멤버들이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로, 팀 멤버 화영을 나머지 멤버들이 따돌린다는 혐의가 급속히 퍼졌다. 사람들은 화영을 괴롭혔다는 멤버들과 티아라 소속사 코어콘텐츠미디어(현 MBK 엔터테인먼트)를 향해 해일처럼 일어섰다. 사태 당시, 많은 논평가가 대중의 분노를 동일시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일상에 만연한 따돌림이란 트라우마가 아이돌이란 촉매를 타고 폭발했다는 것이다. 물론 옳은 얘기지만, 사태를 전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잘 살펴봐야 할 지점이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맥락이 있다. 티아라 멤버들이 화영을 겨냥해 의지 운운하는 트윗을 쓴 순간, 그걸 목격한 사람들의 첫 반응은 트라우마로 인한 ‘분노’가 아닌 ‘유희’였다.
“올림픽을 보겠다는 의지”, “반드시 식사를 하겠다는 의지”, “드립 천재 박수 드려요 ^^”
짓궂은 패러디가 속출했다. 대중은 이죽거렸다. “카메라 앞에선 착한 척 해도 너희도 별 수 없는 것들이구나.” 분노란 기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건 김광수 대표의 ‘중대 발표’가 거행된 직후였다. 김광수 대표의 해명은 정재계 인사들의 책임 회피용 언어와 한배에서 나온 듯했다. ‘해킹’이라는 단어의 기시감(보통 ‘북한의 소행’이란 익숙한 단어가 꼬리를 물곤 한다), ‘한류’라는 배지를 보여주며 나라에 대한 기여를 내세우는 재벌 총수식 화법, 빤한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는 금속성 안면 조직, 피해자를 되레 화살 앞에 내모는 책임회피.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오만과 패악의 표정이다. 대중은 타올랐고 거대하게 몸부림쳤다. 그 순간부터 사태는 ‘왕따’란 논점 밖으로 범람했다. 대중은 거대한 부조리와의 대결이라는 서사를 상정했다. 정치적 지배 권력의 잔영을 김광수 대표와 티아라에 투영한 것이다. 타진요, ‘나꼼수’ 부류 음모론을 연상케 하는 진실의 요구라든가, 1인 시위를 벌이겠다는 정치적 행동 플랜도 의미심장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티진요’가 못마땅해도 지금은 없는 것보다 낫다는 전략적 판단도 발견됐다. 이를테면, 부패한 권력과 민중의 대결, 그 연예계 버전이랄까.
그러므로 티아라 사태의 중심에는 ‘왕따’도 티아라도 없었다. 엄지를 내려 확인하려는 생사여탈의 권능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욕망이 움틀 거리고 있었다. 정계의 거물들은 아무리 궐기해도 처단하기 난망하지만, 딴따라들 앞날은 대중의 손아귀에 달렸다. 그리고 대중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마치, 일종의 학습효과처럼.
역시 2012년 벌어진〈무한도전〉 ‘슈퍼7 콘서트’ 사태는 예능 산업의 정체성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다. 슈퍼 7 콘서트는 방송사에서 방영용으로 기획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MBC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무한도전> 장기 결방을 대신해 출연진들 차원에서 추진한 이벤트다. 만약 공영방송이 방송의 일환으로 행사를 열며 고액의 입장료를 책정한다면 논점이 되겠지만, 이 경우는 반드시 경비를 충당해야 하는 행사였다. 그렇다면 입장료 책정 역시 불가피할 것인데, 나는 정말로 수익만을 목적으로 기획한 행사라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방송 산업은 자본의 총아다. 그들은 웃음과 위안을 주고 돈을 버는 산업종사자다. 하지만 〈무한도전〉 팬들은 그것이 과도하다며 배신감을 느낀 듯했다. ‘무한도전 정신’을 저버리고 돈벌이를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거다. 이것이 준비 및 홍보 과정의 미숙함과 〈무한도전〉이 내걸어 온 공익적 캐치프레이즈와 겹쳐 역풍을 불렀다.
이 사태에서 가장 난감했던 건 인식의 문제다. 언론과 대중이 말하는 ‘무한도전 정신’이 과연 뭐냐는 거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시혜를 철학으로 삼는 윤리적 엘리트도, 혼탁한 자본주의 사회를 비추는 고독한 도전자도 아니다. 〈무한도전〉은 그저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감동을 파는 예능 프로일 뿐이다. 봅슬레이와 레슬링, 가요제와 연말 콘서트. 처음부터 거기에 어떤 숭고한 가치가 있었던가. 그 도전에 무슨 이념과 실천, 절박한 희생이 있어 현실을 바꾸기라도 했던가. 이건 시작부터 끝까지 엔터테인먼트였고 TV 속 사건이었다. 스타 개그맨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면 시청률과 몸값은 올라간다. 시청자들은 그걸 보며 주말 저녁 정서적 감흥을 얻는다. 대중은 그 숱한 도전에 이미 페이를 지불해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콘서트 파행과 길의 하차 선언으로까지 이어진 촌극은 연예인에게 공적 이미지를 과도하게 투사한 결과다. 연예인은 대중 앞에 노출된 존재인 만큼 그 책임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과 연예인에게 정치인, 자선 사업가 같은 공익적 모범을 요구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런 일그러진 인식이 토대가 되어 공적 영역의 예능으로의 전이가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다. 슈퍼 7 콘서트 사태는 이런 대중의 인식에 편승해 연예 산업이 스스로 조장한 이미지가 어떤 재앙을 불러 오는지 경고한다.
표본실의 연예인 혹은 박제된 연예인. 한국 사회가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침 도는 안줏거리다. 아마 어떤 사회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 대중과 언론이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정체성은 분열적이다. 우리는 예능을 향해 더욱 선정적인 재미를 주문하고 탐닉한다. 하지만 그들이 ‘공인’으로서의 책무와 모범시민으로서의 계율, 높은 도덕적 기준에서 한 발이라도 벗어나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달려든다. 그러면서도 연예인의 정치참여엔 눈을 흘기는 이곳은 모순과 분열의 정토다. ‘딴따라’와 ‘공인’, 양립하기 힘든 정체성의 골격을 따라 연예인이란 존재를 박제하는 것이다.
슈퍼7 콘서트 논란처럼 연예인에게 공익을 요구하고, 그를 통로 삼아 티아라 사태처럼 정치적 공분이 예능의 영역으로 전이된다. 타진요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여론은 확정된 결론 위에서 응징을 향해 달리기에 항상 극단적 결과가 벌어진다. 퇴출과 하차. 정치가 세우지 못한 정의를 그 잉여의 영역인 예능에서, 여론의 강제력을 통해 대중의 손으로 관철하려 드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에게만 책임을 묻기 힘든 사태다. 기획사는 아이돌 그룹의 해외 진출을 국익을 선양하는 K-POP 전사라 포장한다. 언론은 하루는 방담코너 L양으로, 하루는 헤드라인의 한류스타로 연예인을 팔아먹으며 기생한다. 이것이 정립되지 않은 대중의 인식과 조응하며 주기적 참사를 빚어낸다.
바라건대, 이 기회에 확실히 정하도록 하자. 딴따라냐, 공인이냐. 예능이냐, 다큐냐. 언론과 기획사 모두 하나만 택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것이 구조적 해결이 힘든 일이라 말할 순 있겠지만 분명히 염두에 둬야만 한다. 둘 사이를 널뛰며 비겁한 분풀이를 즐기는 한, 연예인에게 정의를 요구했다, 내키는 대로 심판해버리곤, 끝장을 보고서야 자성하는 쳇바퀴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으며, 예능과 연예인의 적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무게중심을 잡아야 한다. 군중의 이름으로 명하는 정의의 퇴출. 또 다른 사태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이 선택을 회피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