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진 기자 회견에 관한 비평
이 글은 어떤 분이 민희진 기자회견에 관해 쓴 비평인데, 페이스북에서 읽었다가 트위터에서 공유되고 있는 걸 다시 보게 됐다. 민희진이 민지 이외의 쏘스뮤직 연습생들을 뽑지 않은 이유로 많은 나이와 모종의 결격사유를 언급한 발언을 비판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얘기해 볼 만한 지점을 풍부하게 풀어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몇 가지 말을 덧붙여 보고 싶다. 먼저, 글의 결론 "아이돌 산업은 청소년의 층위를 서열화한다"는 물론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오래전부터 케이팝과 무관하게 성적표대로 등수를 받고 진로가 서열화돼 온 현실에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든다. 원론적인 얘기라 소용이 없다는 게 아니라 케이팝에 관해 구체성과 개별성이 있는 진단이 아닌 것 같다.
이 글은 청소년의 취약성과 그들을 보호해야 할 산업의 의무에 관한 글이지만, 논지의 많은 부분이 청소년이 아니라 직장 상사와 취업에 관한 유비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이런 논리 전개의 우회는 이 글뿐 아니라 민희진 사태를 평하는 글들의 공통점이다. 각자의 사회생활/직장생활 관념으로 사태를 가늠하는 숱한 말은 물론 세대론과 문화혁명론, 심지어 코난오브라이언까지 글의 제재로 불려 왔다. 그건 이 사태가 그만큼 다양한 각도를 품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런 와중 케이팝을 정면으로 논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글은 잘 나오지 않는 역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뜨거운 논제에 자신의 위치와 감정을 대입하며 발언했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잘 말할 수 있는 분야가 발언을 위한 가지각색의 통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것은 읽는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앉아있는 서로 다른 좌석에서 논란을 관람할 수 있는 스크린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민희진 발언의 어폐를 ‘청소년’이란 카테고리로 묶기는 힘들어 보인다. 나이로 사람의 쓸모를 매기고 높은 사람의 취향으로 아랫사람을 평가하는 건 인간을 대상화하는 행위다. 청소년에게 가해질 경우 더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청소년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획사 연습생이 다 청소년인 것도 아니다. 일이십 대의 나이를 줄 세우는 건 케이팝 산업의 뿌리 깊은 악습이며 케이팝은 이 사회는 물론 연예산업 내부에서도 연령 대상화가 가장 극심한 산업이다. 아이돌로 데뷔하고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올무는 더 억세게 조여진다. 20대 중반만 돼도 할머니 소리를 듣고, 가족 모델로 재현되는 그룹 내 케미스트리에서 모성을 연기하는 것이 케이팝 여자 아이돌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미성년자일수록 취약 계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취약한 위치에 있다. 어릴수록 상품가치를 높이 쳐 주는 게 이 업계니까 말이다. 연습생들 나이를 태연하게 품평한 민희진의 발언은 소위 회사 대표나 기획자들이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그들 뇌수에 절여진 사고방식을 아주 솔직하게 노출한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민희진과 방시혁은 업계 상황에 비해서도 연령 대상화를 내면화한 정도가 심한 사람들 같다. 뉴진스, 르세라핌, 아일릿 그들이 만든 하이브 걸그룹 전체의 그룹 구성과 운영에서 그런 강박과 억압이 감지된다.
글쓴이는 “문제는 민희진 씨 기자회견에서 온갖 징후와 동시대성을 읽어내는 성인 중 이 발언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성인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발언은 어떠한 쟁점도 되지 못했다.”라고 평했다. 그 기자회견에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서 왜 사람들이 민희진에게 열광하느냐 보다 왜 그것들이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 버리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오히려 저 글은 아마도 드물게 쟁점으로 채택된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차라리, 트위터는 물론 대부분의 여론 형성 장소에서 민희진에 관한 부정적 어투가 용납되지 않을 만큼 지지가 절대적인 데도 왜 저 발언에 관한 비판만 일정 규모로라도 호응을 얻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 지점에 내가 말하고 싶은 본론이 걸려 있다.
아마도 '논란과 무관'한 청소년들에 관한 발언이기 때문일 것 같다. 민희진이 언급한 선택받지 못한 연습생들, 그러니까 ‘아이들’은 어른들 때문에 유탄을 맞아선 안 되는 '순수한 제 3자’ 나아가 ‘순수한 피해자'로 인식된다. 민희진을 지지하거나 하이브를 싫어하는 사람들 혹은 중립을 취하는 사람들이 "편 가르기에서 벗어난 근원적 성찰"인 것처럼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비할 수 있는 주제다.
트위터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PC 친화적인 SNS고 십 대 이용자가 많다. 트위터에서 꾸준히 공유되는 PC 토픽 중 하나가 청소년 문제다. 청소년은 성인들의 보호를 요청하는 존재이기에 정서적 동조를 얻기 쉽다. 모든 어른은 과거의 청소년이었다. 청소년 토픽은 여론 참여자들이 "내 일처럼" 몰입할 수 있는 주제다. ’촉법소년‘을 향한 증오심이 날뛰는 사회에서 이런 가치 지향적 속성이 트위터를 희소한 성격의 공론장으로 만드는 것이겠지만, 요점은 이것이 여성/직장인/워킹맘들이 민희진에게 자기를 투영하며 열광했듯 또 다른 각도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쟁점이란 거다. 앞서 언급한 저 글의 ‘직장인 유비’라는 우회적 통로가 현재 직장 생활을 하는 성인들이 글에 빠져들 수 있는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민희진을 보면서도 상사의 ‘갑질’에 수모를 겪는 나를 발견했고, 저 글을 읽으면서도 상사에게 대상화되는 나를 발견했을 수 있다. 비록 민희진에게 환호다가 민희진을 비판하는 글에 동의하게 되었을지라도 사태를 자기중심적으로 소비하는 태도는 바뀐 것이 없는 셈이다.
민희진이 연습생들을 서열화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내 일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사람들이 성찰적 시선을 내어 줄 공간이 열려 있다. 여기서 논의의 공간이 밀폐돼 있는 건 '나와는 동 떨어진 존재‘, '그렇게 대해도 되는 존재'를 향한 폭력이다. 저 기자회견을 통해 확정된 대립 구도에서 민희진은 뉴진스를 보자기에 싸서 업은 채 하이브와 하이브 무릎 아래의 르세라핌, 아일릿과 대치하고 있다. 이들은 계모와 친모가 나오는 전래동화 콩쥐팥쥐의 악역을 맡은 아이돌, 일본 국적에 성인이라 공감과 연민이 가닿을 여백조차 없는 아이돌이다.
사람들은 악역 없이 선역만 있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매질하는 손 맛없이 바른말만 하는 건 재미가 없거든. 징벌을 거행하기 위해 선악구도가 필요하고 악역이 더 악마화되기 위해 선역이 더 미화된다. 누군가를 공공연히 때리고 모욕하는 걸 합법화해 주는 것이 선악 이분법의 상투적 서사다. 르세라핌과 아일릿은 회사와 계약을 하고 회사를 따라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들이 악역이 된 건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저 기자회견의 모노드라마를 연행하며 선역이 된 이들의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다(이들을 향한 악플을 보면 정말이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룹 계정은 물론 멤버 개개인 인스타 계정까지 악플에 점령당한 상태고 노골적인 악플에 좋아요 만 개가 찍힌다. 저들과 함께 콜라보를 한 다른 연예인 계정에까지 몰려가 뉴진스를 들먹이고 빈정거리면서 ‘손절’을 종용한다).
성찰이라 불릴 만한 근원적 시선이 비판적으로 향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모두가 "그래선 안 된다"라고 익히 알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경우엔 혹은 누군가에겐 "그렇게 해도 된다"라고 믿는 굴절된 인식의 뿌리이고 우리와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진짜 타자에 관한 태도다. 다소 거창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모든 메이저리티의 지배와 마이너리티의 실존을 사유하는 윤리적 지층이기도 하다.
단편적 예를 들어서 노래를 못한다는 이유로 어떤 모욕을 당해도 된다고 믿고, 하이브의 잘못을 빌미로 소속된 아이돌을 망가트리는 놀이에 가담하는 것이 정의인지 악행인지 자문해 보란 말이다. 일본인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를 향한 적개심이 군중의 악의를 추동하는 연료로 보급되는 현상까지 말이다. 민희진은 핏줄이 선 눈과 쇳소리가 들리는 목소리로 “사쿠라”란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짖었다. 그 기자회견에 의해 추동된 반지성적인 폭력이 열세에 처한 약자를 돕는 정의로운 의거처럼 실행되고 있다. 이 역겨운 가치 전도가 민희진 기자회견이 부른 가장 치명적인 오류다.
이런 말을 해 봐야 '필요한 성찰'이라고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 건 민희진 대 하이브의 돌이킬 수 없는 이분법 프레임 속에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얘기로 규정당한 상태니까. 사실은 ‘내’가 듣기 싫은 이야기고, 내가 ‘편들기 싫은’ 대상을 위한 변호처럼 들리니까. 그렇게 편협하고 맹목적인 태도에 성찰 같은 건 애시당초 존재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