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ocial Critic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C 워너비 May 24. 2024

편견과의 내통

강형욱 비판

강형욱이 폭로에 휘말렸다. 그는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개 전문가다. 자신이 설립한 훈련소에서 근무한 직원들이 숨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고 있는데, 고용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부터 맡았던 개들에 대한 취급까지 앞 다투어 고발이 이뤄졌다. 강 씨는 24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입장을 밝혔다. 여론은 대체로 강 씨의 해명을 신뢰하는 분위기다. 그 스스로 인정한 잘못과 고발자들 말을 다시 들어 봐야 하는 대목이 있음에도 그를 곧장 지지하는 건 성급한 판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강 씨의 입지는 거의 위인 급이다. 현재 여론이 강 씨에게 거는 신뢰는 이 사회가 그를 소비해 온 맥락과 직결돼 있다. 이번 사태는 폭로들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한국 반려견 문화의 주소를 들여다볼 좋은 기회다.


강형욱의 입지는 원래부터 왜곡된 면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반려견 산업이 성장하며 미디어의 지명을 받아 스타가 된 전문가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여론은 반려견 산업에 부정적인 이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강 씨의 멘토 노릇이 사실상 반려견 산업 바깥의 여론을 대신해 견주들을 '참 교육'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강 씨가 방송을 통해 멘토 활동을 하며 입안한 지론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다들 알다시피 1) 개가 아니라 개를 키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며 2) 개보다 사람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1)의 경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그러므로 나쁜 건 사람이다, 로 정리되고 2)의 경우 인권 앞에서 동물권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단호한 어조와 “사람을 해한 개는 생명의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개통령’이 집권한 십 년 동안 두 명제는 반려견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 인식처럼 공유되고 자리 잡았다. 그가 문제견 솔루션을 찾는 과정에서 보여준 행동과 발언을 거쳐 저 명제들은 치우친 방향으로 전파되었다. 그는 사람의 권리가 동물보다 위에 있다고 늘 강조하지만, 견주들에게는 ‘개 키우는 사람은 약속을 잡아서는 안 된다’라고 반려견에게 종속된 강한 의무 부담을 요구한다. 그가 대변하는 사람의 권리는 곧 비반려견주들의 권리이며, 견주들에겐 남의 권리를 해치지 않도록 무한 관리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강형욱은 사람 > 동물을 강조하지만 동물권 개념이 정립된 적이 없는 한국 사회에선 그 역의 등호가 통용된 적도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사실상 비반려견주 > 반려견주로 뒤바뀌어 사람들 의식에 수용됐다.


방송에 나오는 여타 전문가들이 문제견의 행동에 집중하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강형욱은 견주의 행태에 집중하고 해결책이 획일화되는 면이 있다. 문제를 사람에게서 찾는 특유의 스탠스 때문이지만 그래서 그의 해법엔 근원적 한계가 있다. 반려견 사육에 적대적이거나 미비된 사회 환경 같은 구조적 문제 및 개별 반려견 개체의 특수한 문제까지 견주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한편으론 부모 형제도 못 바꾸는 게 사람인데 어떻게 강 씨가 사람을 고칠 수 있을까. 강 씨의 방송이 견주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하고 고함치는 퍼포먼스로 채워지는 건 그 논리적 귀결이다. 그건 특정한 부류의 ‘노답’들에게 환멸하는 인간혐오의 전시다. 시청자들은 그것을 ‘개빠’들을 조지는 ‘참 교육’과 부정적 여론 재생산으로 소비한다.


반려견 산업이 팽창하며 부산되는 갈등도 늘어났다. 그를 중재해야 할 사람들이 강 씨 같은 개 전문가다. 강 씨는 개 키우지 않는 사람들 요구에 개 키우는 사람들 현실을 무 자르듯 맞춰왔고, 따라서 반려견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다지는 것에 가깝다. 그는 문제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졌고 안락사를 ‘최종적 해결책’으로 들먹이는 일도 잦아졌다. 그걸 보며 “말 안 듣는 개는 패야한다” 따위 통념은 확신을 선물 받는다. 사람이 동물보다 우선이란 건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사람도 살기 힘든데 얼어 죽을 동물 타령이냐”라고 맹신할 수도 있고, “사람만큼은 아니라도 동물도 존엄이 있다”라고 성찰할 수도 있다. ‘강형욱 이후’의 한국 사회가 더듬어 가야 할 평탄하지 않은 갈림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여의 거죽을 쓴 테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