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두 번째 기자회견은 마치 승전한 장군이 말을 몰고 적국의 수도에 천천히 입성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민희진의 화색은 한결 편안해 보였고 라이브 채팅창에서는 자축의 깃발이 올라가며 나부꼈다. 30일 법원이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민희진은 어도어 대표직 자리를 보전했다. 하이브가 주주총회에서 이사회를 물갈이해 여전히 해임당할 가능성에서 빠져나오진 못했지만, 불리할 거라 예상되던 법정에서 승리했으니 법리적 명분과 여론 싸움의 고삐는 민희진이 쥐게 됐다. 하이브 측에 "화해"를 제안한 장면은 그의 여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제스처였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맞다이’ 승률이 나쁘다. 빅히트 뮤직에서 하이브 멀티 레이블 체제로 전환한 후 벌어진 주요 사태마다 웃었던 적이 없다. “하이브가 제작한 첫 걸그룹”이라고 홍보했던 르세라핌은 학교 폭력 기록이 있는 멤버를 끼워 넣었다가 역풍을 맞았고 해당 멤버 탈퇴로 간신히 수습됐다. SM 엔터 내부에서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SM 인수에 덥석 뛰어들었다 카카오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하이브 내부에서 일어난 분쟁에서도 패배했다.
방시혁으로 수렴되는 하이브 고위 관계자들은 판단이 경솔하고 시류를 읽는 안목이 없는 것 같다. 민희진의 첫 번째 기자회견으로 여론의 지지를 뺏긴 것은 불의의 일격이라고 치자. 민희진을 어도어 대표직에서 해임하는 게 목적이었던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무대였던 재판에서마저 패소한 결과를 보면 도대체 무슨 목적에 어떤 승산을 가지고 떠들썩하게 일을 저지른 걸까 의문이 든다. 민희진이 하이브로부터 독립할 의사가 있었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 하이브가 어도어 지분을 80프로를 소유하고 있어서 실행 가능성은 거의 봉쇄돼 있었는데도 말이다.
민희진과 내전을 벌인 한 달간 방시혁과 하이브는 물론 아일릿, 르세라핌, BTS 같은 소속 그룹들마저 싸움에 연루되며 이미지에 자상을 입었고 20만 원 선이 붕괴된 주가는 다시 4퍼센트 하락했다. 그런데도 민희진을 해임시키는 명분을 얻는 것조차 실패했다면 대체 뭘 위한 싸움이었던 걸까. 하이브는 입장문을 통해 법원 판결문의 “하이브에 대한 배신적 행위”라는 문구를 인용하며 의미를 찾고 있지만 거기 설득당할 사람은 적어 보인다. 현 상황은 그냥 하이브의 패배다. 애당초 이사회 구성까지 민희진에게 다 넘겨주지만 않았어도 분쟁의 씨앗이 돋아나지도 못했고 민희진을 해임하기 위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일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이브는 경솔하고 허술하다.
일전에 민희진의 스탠스를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이건 민희진이 하이브를 무릎 꿇린 사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 기자회견은 궤변과 오류, 인지 부조화 투성이었지만, 민희진 혼자 단기필마로 하이브란 대기업과 맞서 싸운 건 더하고 뺄 것 없는 사실이다. 직관적으로 이 구도만 봐도 민희진이 방시혁 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 하이브가 여론 전에서 밀렸다. 이건 민희진이 매력적인 만큼 방시혁이 매력이 없어 보이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이브란 조직, 그 임원들 전체가 구태하고 비겁하고 언플이나 일삼는 케이팝의 적폐, '개저씨'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당장의 주가가 빠진 것보다 대기업으로서 도덕적·사회적 지위가 훼손됐다는 거, 이게 훨씬 큰 타격이다. BTS를 통해 쌓은 케이팝 국가 대표 이미지에 몇 줄로 금이 가버렸다. 민희진의 선악 이분법 전략에 몇몇 하이브 그룹까지 흡수당하며 이미지가 오염된 것은 그 그룹의 팬들로선 가장 우울한 소식일 것 같다.
민희진이 방시혁 보다 편들어 주고 싶은 사람이고 상황 대응도 몇 수는 앞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건 승패의 논리지 도덕이나 옳고 그름의 논리는 아니다. 민희진이 누리는 도덕적 우위는 '콩쥐' 서사로 요약되는데 그건 누군가를 '팥쥐'로 만들면서 반대급부를 누리는 가학적이고 작위적인 서사다. 민희진의 승소 소식을 공유하며 정의가 승리했다는 듯이 "콩쥐가 이겨" 같은 말을 뱉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그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이 따돌림의 프레임을 공고히 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있기에 즐거운 사람들이다. 바로 이 지점, 책임 없는 주체에게 돌을 던지며 정의를 세운다고 믿음을 공유하는 가치 전도가 민희진이 군중 심리를 등에 업은 비결이다.
방시혁은 민희진 기자 회견이 끝나고 자신도 기자 회견을 잡으면 어땠을까. 빈말 같은 가정일 뿐이지만 그 외에 전황을 뒤집을 방법 같은 게 있었을까. '내 새끼 지키려고 얼굴 까고 나온 어미' 대 '뒤에서 수작이나 부리는 ‘개저씨’ 집단'이라고 프레임이 잡힌 상황에서 아무리 입장문을 내고 기사를 뿌려 봐야 또 다른 헛수작으로 밖에 안 보인다. 사람들은 민희진이 옳다고 판단해서 지지한 것이 아니라 화끈함과 통렬함('도파민')에 감전돼서 열광했다. 주주 간 계약이 어쩌고 숨겨진 사실이 있다는 식으로 흘려 봐야 들을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 최소한 같은 조건으로 링 위에 올라와야 관심을 끌고 귀를 열기라도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있었던 민희진의 2차 기자회견은 1차만큼 강렬한 쇼맨 쉽은 없었지만 자신의 육성으로 법원 판결에 따른 하이브 측 입장문을 반박했다는 점에서 다시금 우위를 다지는 퍼포먼스였다.
방시혁이 기자 회견장에 앉은 채 마이크 앞에서 잠시 목을 고르다가 "네, 맞다이로 오라고 해서 나왔습니다"라고 첫마디를 뗐다고 상상해 보자. 그 순간 커뮤니티 리젠이 폭발하고 SNS에서 쇼츠 영상이 무한 공유되며 또 다른 밈을 낳았을 수도 있다. 이 복마전 자체가 엔터테인으로 승화되며 모두가 승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민희진의 기자회견 이후 나온 하이브 입장문에 사쿠라 이름을 떡하니 박아 놓고 뉴진스 홍보가 부족했던 원인인 것처럼 흙탕물을 타 놓은 걸 기억한다. 아이돌들이 이룬 성과엔 자신의 이름을 얹어서 공치사하고 나쁜 일에는 아이돌을 떠밀어서 덮어쓰게 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런 배짱이나 결단력이 있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