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를 볼 때마다 궁금증이 든다. 소위 Y2K 콘셉트는 왜 자꾸 VHS를 매개로 재현되는 걸까. VHS는 팔구십 년대의 매체다. 00년대까지 유통되긴 했지만 90년대 말~00년대 초반을 상징하는 미디어 매체는 단연 CD다. Y2K는 이름부터 특정한 연대를 가리키지만, 뉴진스의 Y2K는 구체적 시대상이 아니라 아날로그를 경유한 전자적 레트로 이미지, 무엇보다 막연한 노스탤지어를 피워내는 것 같다. 뉴진스 애플리케이션 ‘포닝’의 트레이드 마크 폴더 폰처럼 과거의 디지털 소품이 불려 올 때라도 정서가 아날로그화 돼 있다. 복고는 과거를 소환하는 것인데, 뉴진스는 현재를 열화 된 화질로 출력하고 현재에 빛바랜 톤의 필터를 덧씌운다는 인상이 든다. 이것이 흘러간 아이콘을 하나하나 무덤에서 소환하던 십 년 전 90년대 복고와의 차이점이다.
내가 떠올리는 Y2K, 세기말과 밀레니엄은 아날로그 세상이 디지털 세상으로 갈아 엎어지는 전환기였다. 그 전환이 2000년 1월 1일, 새로운 밀레니엄 도래와 함께 천지가 개벽하듯 단절적으로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과장된 공기가 사회를 떠돌았다. Y2K란 말의 유래인 '밀레니엄 버그'는 세계의 형식이 디지털로 포맷되는 인류사 초유의 격변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치명적 오류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노스트라다무스의 ‘공포의 대왕’ 예언을 포함해 온갖 종말론이 나돈 것 역시 지난 천년의 문명사적 종언 뒤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허에 대한 도취가 서사화된 것이리라).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가지 계통의 세상이 혼재하는 난잡함과 부조화가 밀레니엄 시대의 이미지였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날로그 라이프 스타일을 '천지가 개벽하듯' 덮어쓰는 것처럼 과잉된 사이버 이미지가 범람했다.
그것이 표현된 문화적 도상들이 아날로그 악기를 몰아낸 편곡의 테크노 음악, 디지털의 물성을 표현한 듯한 은박 재질 무대 의상, 동시대의 규범을 송두리 째 탈선하듯 머리카락을 염료로 물들이는 것을 넘어 색깔을 뽑아내며 '탈색'한 노랑머리, SF 영화와 스타크래프트·일본 하위문화가 믹스된 잡탕밥 같은 미래주의적 비전이었다. 밀레니엄은 노스탤지어 같은 아늑한 정조로 다림질하기에는 모든 것이 과도했고 혼돈에 차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실존한 Y2K 이미지는 이정현의 ‘테크노 여전사’와 ‘데몰리션 노래방’ 같은 것이고, 뉴진스의 Y2K 이미지는 그와는 시대성, 장소성이 동 떨어진 인스타그래머블한 필터 이미지에 가깝다. <응답하라> 시리즈 <토토가>와 달리, 뉴진스는 90년대도 00년대도 아닌 사람들 머릿속 낡고 오래된 관념 그 자체를 현전 시킨다. 'Bubble Gum' MV 속 뽀얗게 흐려진 뉴진스 소녀들의 형상은 의인화된 노스탤지어의 관념이다. 이 관념은 크게 두 가지 레퍼런스를 통해 조형돼 있다.
하나는 VHS 테이프와 윈도 95 같은 낡은 컴퓨터 운영 체제의 인터페이스, 1980년대 광고 영상 등 자본주의 체제의 흘러간 잔해들을 전시하는 베이퍼 웨이브 영상의 양식이다. 뉴진스의 각종 콘텐츠에 배치된 소품과 그래픽과 폰트 스타일들이 여기서 왔다. 나머지 하나는 90년대 일본 문화다. 뉴진스는 데뷔작 'Attention'부터 90년대 일본 걸그룹 'Speed'를 밑그림 중 하나로 스케치 했고, 'Ditto'를 거쳐 'Bubble Gum'에는 예전 일본 영화의 실루엣과 일본풍 교복을 입은 순정한 미소녀의 매무새가 담겨 있다. 과거의 일본 문화는 허구의 노스탤지어를 로케이션 촬영하는 관념의 휴양지이자 실존한 과거로서의 Y2K를 대신해 제공되는 문화적 대체 기억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란 개념을 남겼다. 레트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시간적 반대말이다. 유토피아가 미래에 올 낙원이라면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로 돌아 가 찾는 낙원이다. 현재에 불안이 드리울수록 과거의 값어치는 미화된다. 십 년 전부터 사회에 만성화된 복고 유행은 역시 사회에 만성화된 위기의 반영으로서 레트로토피아로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현상이다. 불황의 전사, 호황의 마지막이었던 ‘좋은 시절’ 90년대가 절절한 그리움 속에 귀환했었다. 90년대가 현재에 머무른 지 10년이 넘은 상황에서, 새로운 유행의 수맥을 더듬는 엔터 산업은 90년대 이후의 또 다른 근 과거로서 세기말과 밀레니엄을 포착했다. 그 시절은 ‘IMF 이후의 세계’요, 혼돈과 과잉의 주름으로 뒤덮인 시대였기에 타국의 복고풍 문화를 필터로 씌운 ‘안온하고 순결한 도피처’로서의 대안적 과거가 발명된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에스파의 Y2K다. 에스파는 뉴진스와 다른 형식으로 Y2K 콘셉트를 추구한다. 뉴진스가 막연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피워낸다면 에스파는 세기말적 양식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예컨대, 전작 ‘DRAMA’ 콘셉트 포토에서 윈터의 맵시는 90년대 말~00년대 초 한국식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번 ‘Supernova’와 함께 공개된 티저 사진에는 세기말 테크노 가수들 같은 번쩍이는 메탈색 의상과 그 위에 만화 효과처럼 전류가 칠해진 키치한 컴퓨터 그래픽이 박음질 돼 있다.
에스파가 정조준하는 건 세기말의 혼돈과 과잉, 종말론적 비전이다. 야심 차게도 그 음울하고 기괴하고도 조잡한 이미지를 콘셉트로 미학화하고 있다. 그 분위기가 미스터리와 그로테스크, 사이키델릭이 뒤섞인 ‘과도한’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된다. 이것을 이른바 '쇠맛'이라고 불리는 이 그룹의 콘셉트로 묘사할 수 있다. 날붙이를 핥았을 때 혀에 남는 맛처럼, 진하고 비릿하고 차갑고 몸서리 쳐지는 맛. 탐미주의로 추구되는 이상 취향. 에스파 홈페이지에는 모뎀 시절 인터넷 통신처럼 출력되는 화면과 각종 미스터리와 종말론의 관념이 콜라주 된 이미지들이 올라와 있다. 자기만의 수법으로 Y2K의 단편을 집대성한 팸플릿이다.
하지만 에스파의 Y2K는 뉴진스만큼 회자되거나 지각되지는 않는 듯하다. 그 시절 한국의 시대상에 부합하는 건 전자인데도 말이다. 두 그룹의 콘셉트를 대조하는 내용으로 만 번 이상 공유된 한 SNS 포스트에는 ‘뉴진스는 행복했던 과거와 추억을 그려 놓고, 에스파는 미지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자극한다’라고 써져 있다. 에스파가 가리키는 것이 미래라고 설명돼 있지만, 사실 그들이 미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과거다. 한국의 밀레니엄을 풍미한 “잡탕밥 같은 미래주의적 비전”을 2024년에 더 세련된 버전으로 다시 주물러 빚은 것이다.
뉴진스가 보여주는 과거는 남의 기억을 빌려 와 나의 기억처럼 되감은 것이고 따라서 누구의 기억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모두의 추억처럼 사랑받고, 존재했었던 과거는 누구도 본 적 없는 미래처럼 간주된다. 진짜 기억은 승인이 회피되고 가짜 기억이 승인된다. 90년대 복고를 거쳐 Y2K로 오면서, 과거에서 찾는 낙원, 레트로토피아는 점점 더 현실과 해리된 모조의 관념이 되어 간다. 현재의 황폐함이 한없이 이어져서 착즙 되지 않은 도피처가 과거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이 사회의 정신적 유산은 소진된 상태다. 함께 떠들고 떠올리며 되새길 수 있는 공동체의 기억으로서의 과거가 삭제되고 있다. 그것이 지금 문화적 재현이 현실과 공명하며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