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 'Cosmic'
cosmic
1. 우주의
2. 장대한, 어마어마한
대부분의 그룹이 그렇듯이, 레드벨벳은 몇 번의 요동을 겪은 그룹이다. 요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0년 간 이곳에 서 있다. 10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케이팝 산업의 시계 초침은 분침이 초침을 앞지르며 돌아간다. 아이돌의 공식 정년이 7년 정도밖에 되지 않고 그마저 다 채우지 못하는 사례가 널려 있다. 레드벨벳의 데뷔 10주년에 나온 미니 앨범 ‘Cosmic’은 시간의 닫힌 장벽을 넘어 어느 기이하고 아름다운 행성에 불시착한 신화적 여정의 행로가 쓰인 두루마리 양피지다.
레드벨벳은 이렇게 행성에 도착했다. 2014년 여름, 첫 번째 싱글 ‘행복’(Happiness)과 함께 왔다. 돈과 권력, 다툼을 쫓는 어른의 세계와 동심의 세계를 대조하는 교훈적 구도의 가사지만, 사소한 것들에서 기쁨을 얻는 무구한 일상성이 “행복을 찾는 모험일기”라고 쓰인 대목은, 아기자기하고 드넓은 우주를 누벼 온 그들의 디스코그라피를 요약하는 예언의 울림으로 파닥 거린다. 이후 레드벨벳은 3장의 정규 앨범과 두 개의 싱글, 13번의 미니 활동을 반복하며 음악 세계를 겹쌓아 왔다.
레드벨벳은 SM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적 시도가 균형점에 이른 결정체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SM은 한국 상업 가요의 DNA 같은 걸쭉한 흥을 품은 ‘뽕끼’를 지워내고 기존 가요 문법에서 벗어난 사운드를 닦아 왔다. 송캠프를 통해 서구에서 온 음악 작업물을 받아들이며 한국 상업음악 취향의 탈한국화를 이끌었다. 레드벨벳의 음악은 소녀시대 중기 이후의 디스코그라피와 F(x)의 모든 음반을 이어받아 그 실험의 모서리를 둥글게 갈아내며 많은 사람의 취향과 연결 짓는 데 성공했다. 이를테면, 케이팝 신에서 초월적이진 않지만 아무튼 보편적인 모더니즘을 선취한 사례인 것이다.
레드 벨벳의 가장 큰 특징은 ‘레드’와 ‘벨벳’이라는 두 가지 콘셉트의 공존이다. SM 측 설명을 인용하면, "강렬하고 매혹적인 컬러 레드"와 "클래식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벨벳에서 연상되는 감각적인 이미지"가 두 콘셉트의 내용물이다. 빨강의 색감과 벨벳의 질감이 물감처럼 섞이며 다른 아이돌 그룹과 교환되지 않는 레드벨벳의 이미지가 탄생했다. 상반된 콘셉트를 번갈아 오가는 활동은 이미지의 마모를 피하고 모험의 영토를 넓혀서 롱런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레드벨벳은 수많은 노래와 장면을 남겼지만, 내 기억에 남는 이미지를 꼽자면 ‘Power Up’ MV에서 트로피컬한 원색의 세트 배경과 소품들이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처럼 녹아서 흘러내리는 장면들이다. 예쁘게 단장된 디자인의 다이어리 표지 같기도 하고, 한 폭의 팝아트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이미지는 기발하면서 우아하고 지적인 그들 만의 분위기를 한눈에 담아낸다. 낯섦과 매혹으로 가득 찬 어느 행성을 카메라에 담은 파노라마가 펼쳐지듯이.
케이팝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예시 그림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집단적 창작과 컨펌으로 구성된 기획사 시스템 위에서, 일관되고 풍부한 콘셉트를 기술적으로 흠잡을 수 없는 퀄리티로 보여주고, 잘 구상된 미적 감각을 발휘하는 예술 양식이다. 레드벨벳의 멤버들은 기획 요소의 일부로 통합돼 있어 이질적으로 튀지 않으면서 그 모든 기획의 정중앙을 활보하며 생동하는 기운을 채운다. 기획자의 카리스마나 아이돌의 주체성을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여기엔 훌륭한 기획이 있고 기획을 대표하는 아이돌이 있다.
걸그룹이 10년 동안 쉼 없이 활동해 온 건 케이팝 장르 사에서 처음 일어난 사건이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까지 걸그룹들은 몇 년 사이에 단명하거나 표준 계약 기간 7년을 전후로 활동이 마감되었다. 단체 활동의 끈을 붙잡고 이어가는 경우라도 각자의 개인 활동 중심으로 그룹 활동이 재편되었다. 레드 벨벳은 10년 중 2020년 1년을 빼면 늘 새로운 활동곡으로 돌아왔고 또다시 돌아왔다. 이는 걸그룹의 활동 전망이 늘어난 보편적 현실을 대표하는 것이며 케이팝 역사의 진화다.
레드벨벳은 동 세대 걸그룹 중 한 발 먼저 데뷔한 그룹이기에 10주년이란 테이프도 가장 먼저 끊었다. 아이돌은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활동 정년이 짧은 직군이고, 걸그룹은 보이그룹보다 짧다. 하지만 이제 10년이란 시간을 ‘커리어’이자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의 이정표까지 왔다. 레드벨벳이 있기에 ‘4세대’ 혹은 ‘5세대’ 그룹들은 내일을 바라보며 10년의 비전을 기대할 수 있다. 엉뚱하고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던 소녀들은 자신들의 ‘퀸덤’을 세우고 ‘우주’를 날아 ‘장대’하고 ‘어마어마한’ 곳까지 도착했다.
레드벨벳의 여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Cosmic’의 콘셉트가 축제처럼 밝은 곡조의 ‘레드’가 아닌 ‘벨벳’이란 사실은 우연이겠으나 회색 빛 여운을 남긴다. 10주년이란 시간이 자축을 넘어 새로운 시작의 순간으로 선포되는 것까지 이르지는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약속은 멜랑콜리한 선율에 실려 “조금 더 머무르면 어때?”라는 조심스러운 청유로 발화된다. 아득한 우주를 메아리처럼 떠다니는 “조금 더”라는 음향 속에 케이팝의 남은 과제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