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민희진 내전의 페미니즘적 쟁점
민희진 어도어 대표에 관해 풀린 디스패치 기사 두 편은 맥락이 분명하다. 민희진이 경찰 조사에 불려 간 며칠 후에 나왔다. 기사는 5월부터 이어진 하이브-민희진 내전의 연장 선에서 쓰였다. 뉴진스 데뷔가 밀린 배경과 뉴진스 멤버들이 쏘스 뮤직 소속으로 찍은 연습 영상, 민희진이 무당에게 경영 자문을 구한 대화 등을 터트려 놨다. 폭로된 내용의 진위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왜 지금 기사가 나왔고 무엇을 공격하는 것인지 짐작이 간다.
여론은 선택적으로 논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민희진 지지자들은 하이브가 폭로를 사주했다고 비판하고, 하이브 지지자들은 폭로 내용에 짐짓 경악하며 ‘언플’을 저지른 건 하이브가 아니라 민희진이었다고 혀를 찬다. 이 구도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쟁점은 페미니즘에 대한 민희진의 발언이다. 디스패치가 재구성한 메신저 대화에서, 민희진은 “페미년들 죽이고 싶”다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여성 직원들의 업무 태도를 일반화해서 비하한다. 주로 여성 여론이 민희진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겨냥해 엄선된 비화 같다.
하지만 언론 플레이 관점에서 봤을 때 폭탄의 파괴력이 얼마나 클지는 알 수 없다. 이 분쟁은 진영 논리에 의해 피아구도가 화석처럼 굳어진 상태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신들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보고 싶은 사실만 보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팝 팬덤-여성 여론 생산지인 더쿠와 엑스에서는 ‘민희진은 존재 자체가 페미니즘이다’라는 식으로 폭로 내용이 외면되고 있고,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남성들은 ‘오히려 좋아’라고 대꾸한다. 민희진의 ‘성인지 감수성’에 시비를 거는 것은 ‘성인지 감수성’ 같은 개념 자체가 비웃음거리가 된 현실을 재확인해 주고 마는 것 같다.
내가 두들기고 싶은 건 페미니즘에 반하는 민희진의 행적 자체가 아니라 그 행적 안팎으로 배치된 진영 논리다. 그 형세는 민희진이 예의 기자회견에서 취한 여성 투사의 스탠스, 다른 말로 ‘개저씨 슬레이어’ 코스프레와 강렬한 떨림을 일으키고 있다. 수박을 두들겨 보며 얼마나 익었는지 소리를 듣는 것처럼, 민희진을 둘러싼 담론의 구조에 엑스레이를 쏠 것이다.
민희진 현상은 젠더적 퇴행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민희진을 격찬하는 이들은 몇 가지를 외면한다.
1) 민희진의 기획 세계는 페미니즘에 부합하는 바가 그다지 없다. 나는 뉴진스를 '미학적' 관점에서 찬양하는 광경이 의아하다. 저런 사람들이 미학을 뭘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학은 단순히 뭘 예쁘게 꾸미는 것 이상의 이념이다. 저 유명한 카프카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란 문장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타성과의 긴장 관계없이 성립할 있는 개념일까. 뉴진스는 변증법을 좋아하는 민희진의 철학답게 많은 부분 케이팝의 관습을 뒤집어서 기획한 그룹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그 기획들이 너무나 통속적인 이미지로 수렴한다. 고전적 소녀상과 수동적 여성상, 아이돌 주체성의 소외 등 케이팝 신에서 진보한 개념들까지 거스르고 뒤집었다. 걸크러시 그룹들이 여성의 주체성과 자기애를 피력하고 따라서 진취적인 태도로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면 뉴진스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를 진열하고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뉴진스는 멤버들 음색과 창법이 획일화돼서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 명의 작가가 만든 작품으로서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튀어나온 개개인의 개성을 대패로 밀어낸 것처럼 보인다. 민희진이 어린 멤버들을 대상화한다는 비판이 많았던 건 그와 이어지는 현상이다. 민희진이 SM 시절부터 만든 작업물을 통 틀어 봐도 예쁜 꾸밈새가 여성 소비자 취향에 부합하는 성격은 있지만, 케이팝 역사에서 진보해 온 젠더적 지향에 부합하는 내실은 없었다. 케이팝 논평가들이 뉴진스를 꾸미는 대표적인 말은 "케이팝의 기존 공식을 깨트렸다"이다. 민희진 역시 그 사실을 자부하고 있지만, '탈주'의 도착점은 급진성이 아니라 안전한 보수성인 것이다.
2) 민희진의 아이돌 기획과 운영은 그 내용 자체가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거스른 부분이 있다. 뉴진스 ‘Cookie’ 가사가 어린 여성들을 성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은 타당함이 논쟁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어진 ‘OMG’ MV에서 그런 종류의 젠더적 비판이 '정신병자들의 불편함'처럼 묘사된 건 그냥 넘기기 힘들다. 민희진을 무슨 '개저씨 슬레이어'나 페미니스트 투사처럼 찬양하는 분위기가 수긍이 안 간다. 아니, 최근까지도 정 반대 성향으로 그룹을 운영하던 사람을 갑자기 그런 이미지로 미화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3) 이제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 기자회견조차 페미니즘과 어긋나는 프레임이 흥행 코드였다. 당시 민희진이 반복한 건 자신을 ‘뉴진스 맘’으로 호명하는 일이었다. 뉴진스는 민희진의 ‘내 새끼’들로서 그들 사이 유대 관계가 사람들 심금을 울렸다. 이건 여성 주체의 자리에 모성의 방석을 덮어씌우는 연출이다. 여성의 개인 됨이 가족 구성원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제한되고 그 역할이 숭고화 되는 것이 가부장제의 모성 신화다. 지난 시간 페미니스트들이 깨트리려 애써 온 인습이 품은 뿌리 깊은 정서에 호소한 행동이다. 이미 두 명이나 성인이 된 뉴진스 멤버들도 ‘엄마’ 민희진에게 종속된 객체가 됐다. "거대 기업과 싸우는 여성 임원"과 ‘뉴진스 맘’은 배치되는 명제가 아니다. 둘 다 민희진이 전시한 프레임이다. '뉴진스 맘'은 민희진을 묘사하는 밈으로 소비되고 있다.
4) 기자회견으로 엮인 '콩쥐팥쥐' 내러티브 역시 비판 의식 없이 수용되어 왔다. 이건 ‘민희진의 뉴진스’와 ‘방시혁의 르세라핌/아일릿’이란 배역 구도를 통해, 젊은 여성들이 누군가의 '새끼'로 종속/대립된 가부장주의의 이야기 구조다. 아이돌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아이돌의 자율성이 제한적이라는 건 아이돌의 주체성 보다 기획자의 주도성을 우위에 두는 민희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르세라핌과 아일릿 멤버들이 방시혁의 ‘팥쥐’가 된 건 자신들이 선택한 바도 아니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없다. 뉴진스와 아일릿/르세라핌은 동 시기 같은 회사에서 활동하는 여성 아이돌로서 소통과 연대에 이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이 있지만, 사업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화해 불가능한 선역과 악역으로 갈라져 버렸다. 나는 이 구도가 사회에 퍼진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여성혐오 프로파간다와 얼마나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민희진이 딛고 선 구도에 페미니즘적으로 맥락화할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혼재하는 맥락을 가려내 지지할 지점과 경계할 지점을 분별하는 것이 논평가들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결 구도에 마음을 빼앗겨 찬사를 늘어놓는 건 우상 숭배의 태도다. '남성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여성 임원'은 서사적 매력이 넘치는 구도다. '유리천장'으로 표상되는 권력 지형을 반영하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 외의 사회적 함의를 찾는 시각을 포기한다면 젠더 담론은 성별 이분법으로 환원되는 유사 생물학적 담론이 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에서 촉발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난 지 십 년이 되어 간다. 그 시간 동안 공적 담론에서 경계되어 온 생물학적 성별 이분법으로 젠더 담론이 돌아가고 있다. 이건 민희진과 관계없이 일부 넷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품고 있던 성향이지만, 그 기자회견이 방아쇠가 돼 담론적 차원에서 가시화되고 합리화되었다. 민희진 현상이 어떤 의미에선 젠더적으로도 퇴행인 이유다.
이념을 훼손하는 이념적 지지
인상적인 사실은 민희진 기자회견의 히트 상품이 '개저씨'란 사실이다. 민희진이 ‘개저씨’란 욕설을 부르짖은 것이 남성들에게 그다지 반발을 부르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다. '한국 남자'라는 말에는 그토록 예민하면서 왜 남성을 칭하는 명사 앞에 "개"라는 접두사를 붙인 멸칭엔 관대한 걸까. 그건 이 말의 세대론적 성격 때문이다. '이대남' 혹은 '삼대남'들은 나이 먹은 '스윗 틀딱'들만 '개저씨'라고 믿는다. 영포티 혹은 영피프티들은 젊게 사는 나는 ‘개저씨’가 결코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영피프티들에게 자신이 '개저씨'가 아님을 입증해 주는 신원 증명서가 뉴진스를 좋아한다고 간증하는 행위다.
페이스북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민희진에게 열광하는 중년 남성들의 ‘장문’이 줄을 짓는 건 이 맥락처럼 보인다. '개저씨'의 반대말로서 민희진에게 열광하는 의식. 누가 봐도 '개저씨' 농도 1000%인 위인들이 방시혁을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제 안의 '개저씨'를 남의 것처럼 떠넘기고 조롱한다. 하지만 그 민희진이 만든 뉴진스의 콘셉트가 다른 어떤 걸그룹보다 '개저씨'들 향수에 친화적이란 사실은 아이러니로 나부낀다. 남성 권력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민희진의 투쟁에는 사실은 그 권력의 근원에 침투하는 불온성이 희박하다.
말했듯이 디스패치 기사는 폭로의 의도가 분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못 본 체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2024년 3월 하이브에 접수된 사내 괴롭힘(성희롱)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어도어 여성 직원이 남성 임원을 신고한 사건이다. 재구성된 대화에서, 민희진은 남성 임원과 함께 신고를 묵살하고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줄 방안을 모의하고 있다. ‘무고죄’를 걸어 버리자는 눈에 익은 단어도 등장한다. 신고자는 어도어에서 퇴사했다고 한다. 사내 성폭력 신고가 무마되고 신고자가 불이익을 받는 전형적인 스토리다. 그것을 뒤에서 꾀한 사람이 어도어 대표를 맡은 민희진이라는 의혹이다. 디스패치 기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혹에 대한 입장 표명을 민희진에게 요구해야 할 만큼 엄중한 사안으로 보인다. 직장 권력, 젠더 권력이 구체적으로 발휘돼 구체적 피해사실을 낳고 조직적으로 억압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안이다. 단순히 여직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을 톡으로 흉봤다는 의혹과는 무게감을 재는 단위가 다르다.
이 대목은 현재 거론되지 않고 있다. 원래부터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남성 여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희진이 남성 권력에 대항하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이들조차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엑스와 더쿠에서는 ‘민희진은 존재 자체로 페미이며 평생 ‘까방권’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 공유되고 있다. 이념은 그것을 추구하는 가치와 행동으로 실현된다. 특정 인물이 존재 자체로 이념이 된다는 건 그의 삶이 그 이념에 철저히 부합하는 방식으로 꾸려졌을 때 납득할 수 있는 논리다. 단지 성별이 여성인데 남성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실 만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비논리적인 주장일뿐더러 위험한 발상이다. 그것은 그의 삶의 내용이 아니라 결과만 보는 것이고, 실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공의 화려한 라벨을 쫓는 강자 선망이다. 그가 답습해 온 가부장 사회의 인습과 폭력은 후, 하고 불면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사라졌다. 이건 사람을 미화하는 걸 넘어 이념을 훼손하는 발상이다.
가치 생산 없는 담론의 주소지
논의 상태가 이 지경이 된 건 디스패치의 폭로 배후에 하이브가 있다고 추정되고 민희진을 지지하는 여론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의식이 감지되기 때문일 것 같다. 하이브 역시 페미니즘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헌신짝 취급하는 사업 방식으로는 할 말이 없다. 민희진 보다 더 한 건 몰라도 절대로 덜하지 않다. 나는 여러 차례 하이브를 비판해 왔고,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의견을 다시 쓸 것이다.
하지만 민희진은 페미니즘 담론의 수혜를 입고 있어도 하이브를 그런 식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없다. 공론의 지형을 왜곡하는 건 전자다. 민희진 지지자들은 민희진을 에워싼 진영 논리를 구축하고 있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가치에 대한 추구는 엿장수에게 바꿔 먹은 채 진영 논리의 왕국이 된 지 오래 전이다. 젠더 여론의 경우 생물학적 수준에 고착되는 정체성으로 진영이 구획되고 있어 부족주의도 아니고 종족주의라 불러야 적당해 보인다. 업계 일위 공룡 기업에 대항하기 위한 나머지 케이팝 팬덤의 반 하이브 연합, 그것이 일부 넷 페미니스트들의 동족 의식과 한 몸으로 융합한 상태다.
내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건 단순히 이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사실을 지적해야 할 논평가들이 입을 다물고 관망하거나, 외눈박이들의 아드레날린에 편승해 ‘남성 권력과 싸우는 성공한 여자’ 같은 사람들이 매혹된 대결 구도에 주석을 붙여 주는 텅 빈 글줄을 찍어낸다. 가치에 대한 지향이나 비판 의식 없이 여론의 열광을 재생산하는 상태, 바로 민희진 현상이 빚어낸 어떤 담론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