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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22. 2024

자기 객관화에 놓인 덫

자기 객관화에서 자기 서사의 세계로

자기 객관화는 일반적으로 미덕으로 통한다.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고 모자람을 개선하라는 요구는 자기 계발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자기 객관화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때로는 자신을 냉정한 눈초리로 보는 것이 자존감을 갉아먹고 타인의 시선에 자아를 종속시킨다.     


현실을 완충막 없이 깨닫는 건 현실에 대한 면역력을 떨어트린다. 화상을 입으면 다친다는 것만 알면 되지, 통증을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화로에 팔뚝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다. 적당한 착각과 자기 합리화는 긍정적 자기 이미지의 부재료다.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고 삶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가 된다. 자기 객관화 같은 말은 대체로 타인에 대해 뱉어진다. 너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권유나 요구로서 말이다. 까놓고 말하면 네 ‘꼬라지’를 알라는 거다. 물론 그게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아닐 때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남에게 주제 파악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오늘날 집단의식의 형성지가 된 인터넷 광장에서는 꼭 자기 객관화란 말 자체가 오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취지의 발화가 무수히 넘쳐난다. 어떤 논란이나 공적인 주제에 말을 얹으면 “네 현실부터 걱정해라”라고 일침을 놓거나, 상대방의 처지와 결핍을 넘겨짚으며 “그게 네 현실이다”라고 꼬집는 식이다. 자기 객관화가 타인의 자존감에 자상을 입히기 위한 ‘키보드 배틀’의 날붙이가 되었다는 건 그 개념에 숨어 있는 함정을 정확히 암시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서사를 짓는 이야기꾼이고 그래서 누구나 거짓말쟁이다. 개인의 특정한 시점 없이 세상을 인식할 수 없고 크고 작은 일들을 내러티브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자신에게 얼마나 이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서술하느냐가 생활인이 가진 이야기꾼의 능력이다. 필요한 건 타인에게도 해롭지 않은 이야기지, 자신에게 해로운 현실이 아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야기로서의 삶에 관한 알레고리다. 주인공 파이는 가족과 함께 이주하던 배가 난파되고 한바탕 살인극을 겪은 후 남겨진 현실을 호랑이와 표류하는 이야기로 각색해 버텨낸다. 그는 현실 대신 망상을 도피처로 삼았다. 하지만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던 소년이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아닌 실재의 흉포함과 동거했다면 맨 정신으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어른이 된 파이 파텔은 '진실'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 "둘 중 어떤 이야기를 택해도 난 가족을 잃고 고통 받아요.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나요?"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창이자 삶을 전유하는 수단이고 현실을 살아 내는 힘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진리란 개인의 서사와 공동체의 대화 속에서 합의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들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임의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로티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는 세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세계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느냐에 있다. 이런 관점은 <라이프 오브 파이>가 전파하는 이야기의 실용주의, 혹은 믿음의 실용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삶의 모양이 비슷했고 삶의 경로는 계층에 따라 획일화된 채 제시되었다.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건 개인 바깥에 있는 다수화된 기준과 자신을 맞춰 보는 것인데, 그 기준은 모두가 충족해야 하는 사회의 요구로서 ‘정상성’이라는 개념과 통한다. 이제는 그 정상성이 해체되고 있다. 노동 유연화와 함께 삶의 유동성도 강화됐고, 4인 모델의 정상 가족을 꾸리는 것도 더 이상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가 되어 간다. 그러한 객관적 기준의 소실을 대신하는 것이 뉴미디어 사회에서 떠돌고 있는 이미지의 범람인 것 같다. 맨 눈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시대에, 우리가 현실이라 착각하는 많은 부분은 보정과 편집을 거친 타인의 이미지다. 눈높이에 따라 세상이 보이는 각도는 달라진다. 그런 ‘현실’에 맞춰 자신을 객관화하는 건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현실은 사실과 동의어가 아니다. 개개인을 규정짓고 복종을 요구하는 대상, 그러니까 사회 환경과 가치 체계 역시 현실을 이룬다.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가공된 이미지는 물론 사회적 합의로 구성된 허상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인간 위에 있는 기준이 아니라 개개인 저마다의 행복과 공존이다. 인간은 현실을 위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현실을 살아간다. 저마다의 버전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캄캄한 현실을 밝히는 불씨를 간직하는 것이며,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자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에 대한 존엄하고 진취적인 응전이다.     


“세상을 묘사하는 최종적 어휘란 없다. 옳은 단어는 우리가 상황을 더 잘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우리 밖에 있는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There is no final vocabulary for describing the world. The right words are those which help us deal with our situation better, not those which reflect an objective reality outside of us.")


리차드 로티의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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