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믹스에게 10월 20일은 또 다른 데뷔일로 기억될 것 같다. 데뷔 후 4년 동안 늘 국내 음원 차트에서 장벽에 부딪히던 이 그룹이 처음으로 1위에 오른 날이기 때문이다. 엔믹스의 첫 번째 정규 앨범 타이틀 곡 ‘Blue Valentine’은 아직까지 멜론 차트 TOP100 1위를 지키고 있고 일간 1위에 오르며 대세를 타고 있다. 지난 두 달 사이 에스파와 아이브 같은 탑 그룹을 위시해 많은 걸그룹이 컴백했지만 엔믹스는 이들을 모두 제치고 멜론 차트 1위에 오른 유일한 아이돌이 됐다. 걸그룹 음원이 예전보다 약세인 상황에서 이룬 성과이기에 눈길을 끈다.
해외 시장이 개척된 지금은 국내 음원차트가 예전만큼 아이돌의 입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쓰이진 못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노래가 인기를 얻는 건 여전히 중요하고, 거기에 트렌드를 가리키는 지표로서의 기능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1위 소식은 단순히 노래 한 곡의 히트를 넘어 각고의 분투를 거친 아이돌이 마침내 정상에 등정한 성공 스토리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엔믹스는 음원뿐 아니라 음반 판매를 포함한 전체적인 활동에서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했다. 재작년 ‘Love Me Like This’와 작년에 발표한 ‘별별별’이 차트 상위권에 오른 것이 최고 순위였고 직전에 나온 앨범의 타이틀 곡 ‘KNOW AMOUT ME’는 114위였다. 여러모로 인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기 최정상 그룹과는 거리가 있는 위치, 그것이 엔믹스가 선 자리였다.
생각하면 엔믹스 같은 그룹이 오랫동안 정체돼 있었던 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인기 아이돌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걸그룹 명가’로 불리는 대형 기획사 JYP 소속이고, 동시대의 대표적 비주얼 아이돌로 꼽히는 설윤이 간판이다. 더구나 이들은 라이브 무대를 통해 춤과 노래 모두 실력을 인정받은 지 오래다. 말하자면 자본과 외모, 실력 모든 걸 겸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엔믹스는 왜 이제야 사람들 귀에 가닿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듣기 좋은 노래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원래 엔믹스의 음악은 콘셉트와 퍼포먼스에 특화돼 있었다. 데뷔 때부터 믹스팝이란 슬로건을 전면에 걸었다. 서로 다른 장르·분위기의 음악을 혼합한 편곡인데, 이 실험은 때로는 요란하고 때로는 어수선하게 들렸다. 반면 ‘Blue Valentine’은 훨씬 ‘대중적’이다. 이전보다 무드가 가벼우면서 직관적으로 들리는 멜로디다. 여전히 나름의 변주가 진행되지만 센티함과 흥겨움을 함께 품은 후렴구가 곡의 구조를 잘 장악하고 있다. 요즘 선호되는 노래들의 교집합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노래로 들린다.
또 다른 비결은 멤버 오해원의 맹활약이다. 오해원은 데뷔 직후부터 팬들과 소통하며 보여준 입담과 재치로 유명했던 멤버다. 작년부터 일 년 동안 ‘워크돌’이라는 유튜브 예능 MC를 맡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그가 출연한 장면이 공유됐고, 그를 바탕으로 다른 예능 방송과 광고에도 출연했다. 그룹을 대표해 팬덤 이외의 사람들, 이른바 ‘대중’들과 꾸준히 접면을 만든 셈이다. 그만큼 엔믹스라는 이름이 익숙해졌기에 이전보다 듣기 편한 노래로 돌아왔을 때 귀를 기울인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즉, 기획사가 특정 멤버의 적성에 맞는 활동을 지원하며 그룹 활동의 밑동을 다진 노력이 열매를 거둔 셈이다.
엔믹스가 그동안 보이지 않는 벽과 마주하고 있던 건 구조적 환경에도 원인이 있었다. JYP에는 엔믹스보다 먼저 데뷔한 걸그룹이 두 팀이나 있다. 보통 아이돌은 회사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통해 알려지기도 하고, 대형 기획사 아이돌은 회사를 팔로우하는 고정적 팬덤을 자신의 팬덤으로 유입시킨다. 이미 케이팝 신에서 확고한 위상을 가진 선배 그룹이 있기에 엔믹스는 대형 기획사 신인임에도 회사의 수혜를 백 퍼센트 맛볼 수 없었다. 스타쉽 엔터가 가진 자원을 올인하며 기획한 아이브, 하이브가 제작한 최초의 걸그룹 르세라핌 등 경쟁자들과 다른 점이었다.
엔믹스는 아이돌 그룹으로서 풍부한 매력을 가진 팀이지만, 프로듀싱의 시행착오는 물론,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고전하는 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성공담은 한층 울림이 있다. 현실적으로 4년 차 아이돌이 한 뼘 더 성장한다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엔믹스는 오랫동안 가능성을 품은 그룹에 머물렀지만, 드디어 가능성을 현실화한 그룹이 되었다. 고착돼 있던 걸그룹 신의 구도를 깨트리고 정상급 걸그룹 대열에 새롭게 합류했다. ‘Blue Valentine’은 불리한 현실을 극복해 낸 승전보이자, 침체기를 맞아 지루해져 가던 케이팝 신에서 일어난 작은 지각 변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