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번역가의 성범죄 전과 폭로
번역가 황석희의 성범죄 전과 기록이 폭로 됐다. 그는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 왔다. 이 극단적인 언행불일치를 ‘남페미의 위선’이라며 조소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하는 남성 정치인·명망가들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낯설지가 않다. 황 씨에 대한 폭로 역시 일련의 사건들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여진다. ‘남페미가 또’ ‘남페미는 과학’ 같은 반응이다.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 모순을 품고 있는 건 맞다고 생각한다. 남성이라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남성이 모두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지만,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욕구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신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을 더 크게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 개개인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간다. 공고한 젠더 구조 안 편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기득권 바깥에서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건 모순을 수반한다. 자신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남성적 문화를 홀가분하게 꾸짖는 자리에 서는 건 위선으로 흐르기 쉽다.
이 모순 안에서 전략적으로 운신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속된 말로 계산기를 튕겨서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것이다. 명망가들이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선언하는 건 사회적 자본이 된다. 진보적 이미지와 도덕적 우위, 여성들의 지지까지 확보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과 자신의 교양·진정성·올바름을 구분 지어 주는 차별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황석희 같은 케이스가 발생할 때 폐해도 분명하다.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자기 파괴로 돌아가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 일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된다. 그런 위선은 페미니즘을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가치로 인식되도록 오염시킨다. 어떤 이념을 지지하는 건 자유이지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데는 발언의 책임이 따른다. 하물며 그것이 페미니즘처럼 남성의 존재론과 긴장 관계에 있는 이념이라면 쉽게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엄격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연대하려는 집단에 대한 책임감이 필요한 문제다. 그런 것들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페미니스트 선언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엔 착시가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일탈 사례가 반복적으로 폭로되면서, 마치 그들이 성범죄와 더 밀접한 것처럼 인식되는 오류다. 사회 전체의 성범죄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페미니즘과 관계없는 다수에 의해 발생한다. 그 다수는 성폭력에 반대하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선이란 프레임에 포획되지 않는 것뿐이다.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이가 그것을 어길 때 더 큰 비난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올바른 가치를 방기하기 때문에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 비난을 덜 받는 건 쓴웃음이 나오는 역설이다.
위선의 진원지를 개인의 진정성과 도덕성으로 환원하는 순간 본질적인 지층이 사라진다. 성범죄는 권력과 젠더가 결합된 문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남성이 페미니스트라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 역시 성범죄를 낳는 구조화된 남성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안티 페미니즘 진영이 성폭력 문화라는 개념에 반발하며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 구조의 삭제다. 성폭력의 사회적 성격을 지우고 개인의 일탈로 몰고 가며 남성 전체와 분리해 버린다. 추행을 저지른 것이 평소 남녀평등을 외치던 인물이라면 특정한 개인의 도덕적 실패, 나아가 특정한 집단의 종족적 특성으로 전가된다. 이러한 ‘남페미’야말로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겐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쟁점을 오도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들은 조커와 배트맨 같은 쌍생아다.
'남페미의 위선'을 비웃는 행위는 구조적 성격을 개인화한다. 동시에 위선의 이미지를 일반화해 페미니즘 자체를 무력화한다. 남성적 문화를 재생산하는 진범은 그 비웃음 뒤편에서 사라져 버린다. 모 번역가의 성범죄에 깔린 진정한 모순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