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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ug 07. 2016

허문영의 딜레마

허문영의 이스트우드 지지 철회 해프닝에 관하여.

허문영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빼어난 비평가 한 사람이다. 그의 글은 늘 흥미롭고 배울 거리가 많다. 영화의 디테일을 보는 눈썰미와 글 솜씨, 창의적 발상에서 그를 따라가는 비평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허문영의 글 앞에서 독서를 한다기보다 경청하는 태도로 자리에 앉는다. 세세한 단락에서 이견을 가진 적은 있어도 그의 글이 노정하는 큰 주장에 의문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글을 읽고 어리둥절했다.   

  

한겨레 ‘크리틱’ 코너에 실린 “미렐레스와 이스트우드”란 칼럼이다. 허문영은 <카르텔 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 영화 속 자경주의의 현실적 운명을 비평한 후 미국 대선주자 트럼프를 비판하다가, 갑자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거론하며 글을 맺는다. “만일 그가 트럼프를 공식 지지하고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스트우드에 대한 오래된 애정을 이제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난 데 없는 결론이다. 문맥의 흐름도 그렇거니와, 유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행보를 이유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거는 애정을 회의하는 논리가 그렇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격이 별개라는 건 예술에 대한 초보적 교양 아닌가.      


나는 글을 읽고 트위터에 비판의 코멘트를 남겼는데, 트위터 유저 ‘홍철 없는 홍철팀’님이 반론을 주셨다. ‘허문영이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주목한 것은 타자에 대한 윤리였고, 그 윤리를 빚어낸 작가가 파시스트를 지지한다면 비평가로선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평가는 작품을 경유해 창작자의 윤리와 ‘연루’돼있으며, 허문영의 발언이 겨냥한 건 이스트우드를 격찬한 자신의 비평이었다. 다소 무리한 논지를 펼친 것은 비평가로서 윤리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란 요지였다. 한편 허문영은 같은 코너의 후속 칼럼에서 앞선 발언에 관한 보론을 남겼다(“정치의 심미화라는 것”). 요약하면,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의 삶은 분리하는 게 옳지만, 비평가인 동시에 세속적 연루자로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이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허문영이 사회 칼럼에서 이스트우드를 언급한 건 처음이 아니다. 2009년부터 무려 네 편의 칼럼에서 그를 거론했다. 흥미롭게도 네 편의 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우선 시기다. 09년과 12년에 한 편씩, 그리고 올해 16년에 두 편을 썼다. 모두 미국 대선을 전후로 한 때다. 또한 글의 내용이 반복된다. 09년과 12년에 부산일보에 쓴 글 두 편 다 이스트우드의 정치관이 제재다. 이스트우드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실은 리버테리안이란 주장과 리버테리안이 무엇인지 짤막한 설명이 중복된다.      


마지막으로, 네 편의 글은 점진적인 자기 부정의 형식으로 이행한다. 09년 “이스트우드의 보수”에서는 이스트우드의 리버테리안적 윤리를 서정적으로 묘사하다가, “지금 이 곳의 추한 정치적 언어들을 생각한다. 지금 내가 믿는 정치는 완고한 노인 이스트우드의 '개인'뿐이다.”라고 끝맺는다. 12년 “이스트우드의 선택”에서는 대선에서 롬니를 지지하고 오바마를 조롱한 이스트우드의 촌극에 낮은 한숨을 쉬고 그에게 걸었던 자신의 기대가 틀렸다고 토로한다. 예술가는 현실정치가 닿지 않는 근원적 의제를 탐구하기에 그의 당파적 선택에 우월적 가치를 둘 수 없다고도 말한다. 즉 이스트우드의 사상에 정치적 동조를 표하다가, 예술가의 사상과 현실 정치는 다르다고 일정 부분 말을 물린다. 4년 후 한겨레 크리틱에선 급기야 이스트우드에 대한 애정을 거둘지 모르겠다고 뿌리부터 ‘흔들린다’. 이상 세가지 패턴으로 알 수 있다. 허문영은 트럼프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스트우드의 정치성과 현실정치 행보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고, 점점 괴리감을 느끼며 실망해왔다.


허문영의 말투를 빌리자면, 여기엔 “이상한 사태”가 있다. 4년 전 쓴 칼럼에서 작가의 극우적 당파성으로부터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평가를 분리할 수 있는 방어 논리를 충분히 마련해놓고도 작가를 포기하려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심지어 그는 “미렐레스와 이스트우드”에서 트럼프가 자경단 서사의 주인공 같은 “진짜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악질 정치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허문영은 “정치의 심미화라는 것”에서 “트럼프가 무섭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을 거두는 건 미봉인 것 같다. 예술가의 정치적 당파성과 그의 작품이 별개라면 당파성의 해악이 어느 정도이든 둘 사이 상관관계는 없다. 허문영은 이스트우드가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걸 넘어 오래전부터 그 스스로 파시스트라 불리기도 한 인물이란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을 더 말하는 게 좋겠다.     


이스트우드는 비평가 허문영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잘 알려졌듯이, 허문영의 영화적 취향의 중심에선 서부극이 펼쳐지고, 또다시 그 중심엔 존 포드와 이스트우드가 있다. “미렐레스와 이스트우드”에서 밝혔듯이, 그는 서부극의 자경주의 서사에 매료된 것 같다. 그가 누차 거론한 리버테리안의 극단적 개인주의는 자경주의와 핏줄이 통한다. 그리고 허문영은 비평가를 넘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이스트우드의 리버테리어니즘을 지지했다.      


허문영이 이스트우드 영화에 대해 수행한 비평적 방법론도 인상 깊다. 허문영은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그랜 토리노>를 비평하며, 그 영화들의 윤리적 성취를 작가의 리버테리어니즘에서 찾는다. 리버테리안은 흔히 말하는 보수우익과는 다른 개념이며, 그것은 공화당 노선과도 다르다고 설명한다. 이스트우드에게 씌어진 우익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헐겁게 벗기면서 그 사상에서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인격적(예술가로서의 그리고 자연인으로서의) 등가물”이라는 과격한 해석을 개진한다. 이런 시각으로 작가를 바라 볼 때, 작품에 의거해 작가의 인격을 낭만화하거나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 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정리하면 이렇다. 허문영은 이스트우드 영화의 윤리적 자질을 자연인 이스트우드의 사상과 등가물로 본다. 그것은 관객 허문영의 취향과 맞닿으면서 비평가 허문영이 격찬해 마지않는 것이고 자연인 허문영이 동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허문영이 이스트우드의 당파적 선택을 그의 영화와 왜 그렇게 분리하기 곤혹스러워하는지 자명하다. 이 논리구조 안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곧 작가의 삶에 관한 것이며 작가의 삶에 대한 코멘트는 곧 작품에 관한 것이다. 작가에 대한 깊은 애정과 비평가로서의 감식안은 물론 그에 동조하여 공언한 자신의 신념에도 부채의식을 치르게 된다. 한 마디로 그는 작가, 작품, 비평가-나를 납작하게 중첩시키며 연좌제에 걸린 것이다. 허문영은 "정치의 심미화라는 것"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의 삶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판단은 엄격히 분리하는 게 맞다."라고 수긍했지만 실은 그 원칙을 월장했었다. 이 상황은 허문영이 ‘세속적 연루자’로서의 흔들림에 대한 동일 사례로 예시한 <변호인>과는 성격이 다르다. <변호인> 비평에서 그는 텍스트가 현실정치 인물을 다루는 방식을 텍스트 바깥을 아우르며 비판했지만, 지금은 텍스트와 텍스트의 철저한 외부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쩔쩔맨다.


 나는 비평가가 영화를 경유해 작가의 윤리와 연루된다는 명제에 반대한다. 비평가는 영화를 매개로 작가의 윤리와 관계를 가진다는 게 내가 아는 정론이다. 이미지가 세계에 드리우는 영향력 비평가의 윤리가 무겁다는 점에 통감하지만, 그것은 이미지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장소, 텍스트에 관해 엄수되어야 한다. 텍스트는 분석할 수 있지만, 작가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 설령 텍스트 안의 가치가 작가의 삶을 컨텍스트로 반영한 것 같아 보이더라도, 평자의 임무는 그것이 반영된 양상을 해명하고 텍스트와 텍스트에 관한 작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지, 작가의 삶에 반응해 그의 필모그라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가는 이런 식으로 작가와 연대책임을 지지 않는다.


내가 앞서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한 건 이것이 비평가가 빠질 수 있는 특수한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문영이 아마도 이 딜레마를 처리하기 위해 몇 편의 글을 쓴 것을 좋게 평가한다. 자신이 뿌린 말에, 자신이 품었던 확신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치르려는 윤리적 자의식의 발동으로 보인다. 만약 “미렐레스와 이스트우드”에서 얘기가 끝나면서 작가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는 방식으로 딜레마를 폐기했다면 비평가의 곤경을 작가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준동을 목도하며 이스트우드 영화의 어떤 태도가 떠올라 그가 흔들렸는지 독자로선 정확히 알 길이 없고 그것을 설명하는 건 허문영의 몫이다. “정치의 심미화라는 것”에서 ‘흔들림’이란 표현으로 딜레마를 좀 더 날 것 그대로 현시하면서 - 그것도 완전히 솔직하거나 정확해 보이진 않지만 - 좀 더 높은 차원의 윤리적 노력으로 승화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작가와 연루되기를 자초한 건 다름 아닌 허문영 자신이다. 이 상황을 비평의 윤리적 책임보다 비평과 텍스트, 비평가와 작가의 거리두기, 관계 맺기의 문제로 보고 싶은 이유다. 이런 딜레마를 몸소 재현하고 독자들에게 그것을 유효한 질문거리로 받아안게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도 그는 우리 시대의 특별한 비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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