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vie Critic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C 워너비 Oct 07. 2016

천만 영화 시대의 문제작

영화 <아수라>에 관한 메모 1

<아수라>를 보았다. 그제 처음 보았고, 어제 다시 보았고, 오늘 또다시 보았다. 크게 한 방 먹었다. 김성수가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어설픈 스타일만 있고 내실은 없는 감독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극복하려 얽매이기는커녕 이를 갈고 장점을 밀어붙이는 선택을 했다. 나는 김성수가 대단한 도약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아수라>는 2010년대 천만 영화 시대의 문제작이다. <아수라>는 시종일관 최고 출력의 압박감과 타격감을 관객에게 퍼붓는다. 시멘트 벽에 몸뚱이를 갈며 전진하는 눈먼 맹수처럼 폭력, 폭력, 폭력, 폭력, 폭력 그리고 폭력!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만큼 장르적 향락을 집요하게 추격하는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폭력(정확히 말하면 가학이다)을 한 점에 일점사하고 압력을 누적해서 보는 이의 심장에 부담을 주는데, 엔딩에서 관객에게 비상구를 열어주지 않은 건 정확한 선택이었다고 동의한다. 아수라장이 초토화된 자리는 영화가 끝난 후 뻐근한 잔상으로 오감에 남는다. 이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며 기획은 성공했다. 무엇보다, 연출술이 능란하고 폭력을 꼼꼼하게 통제해서 재현한다.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못 미덥고, 지나치게 힘을 준 폭력이 지나치게 반복돼서 피로하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그것에 우선하는 목적이 있거나 작심하고 추구한 기획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아수라>는 무난한 수작이 되는 대신 진귀하고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다.  


천만 영화가 범람한 2012년 이후 한국 영화를 보는 건 늘 욕구불만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눈치 보고 지나치게 타협하고 지나치게 늘어지고 지나치게 속박돼있는 따분함과 환멸감. <아수라>는 그런 얽매임을 몰살하기 위해 나타난 반항아 같다. 내가 <아수라>를 2010년대의 문제작이라고 말의 내기를 걸 때, 그것은 최대 다수의 취향과 타협하며 주형틀로 영화를 찍어내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독재를 꼬집는 것이다. <아수라>에는 억지 신파도, 가족주의도, 사회비판 같은 명분 덧대기도 없다. 김성수는 미친 외골수처럼 연출 기획을 집행한다. 이것이 얽매임을 반대로 드러내는 극단적 표현, 또 다른 상업적 꿍꿍이일 수 있다는 어렴풋한 불안감도 있다. 하지만 어떤 극단적 반대 항을 마련하며 상업영화 지형을 거세게 흔들어주는 것에 후련함을 느꼈다.


김성수는 "오랜만의 복귀작 <감기>는 흥행에 대한 강박이 있어 사람들 의견을 수용하며 찍었는데, 그런 식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고, 신나고, 창피하지 않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설령 실패해도 내가 만든 영화라고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나는 이 말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고, 응원하고 싶어 졌다. <아수라>는 구성상 <비트>의 타락한 판본, 90년대 방황과 공허의 청춘 서사의 몰락한 후일담처럼 보이는데, 출세작으로 돌아가 필모그래피를 재정초하고 다시 출발하고 싶은 감독의 야심도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자의식이 텍스트에 돌출돼있다는 점에 호감이 갔다.


한국 관객은 아직 이 영화가 주는 육중한 피로감을 즐길 마음가짐이 없는 것 같다. <아수라>는 현재 박스오피스 2위에 올라 있지만, 관객 유치는 저조하고 상영관은 점차 줄고 있다. 대다수 평론가도 좋은 평을 주지 않았다. 나도 <아수라>에 동의하지 않는 점이 많다. 특히 윤리적 차원에서 중요한 거리낌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선 차후 더 긴 글을 써보려 한다. 하지만, 현재 제기되는 비판은 무성의하고 편협하다. 서사의 개연성 평가에 함몰돼 영화의 기획을 보지 못하거나, 영화의 기획을 알아채고도 진가를 캐치하지 못한 채 허세로만 치부하거나, 돈벌이에 눈이 멀어 선정성이 심하다는 백치 같은 비판에다, 남자들만 나오는 또 하나의 여성 혐오 영화라는 비난도 있다. <아수라>가 형제애, 마초 근성 전시, 정의 구현 같은 한국형 범죄영화의 통속성을 '아수라장'에서 장사 지내는 영화라는 걸 모르기에 하는 오독이다.


<아수라>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은 중반의 카체이싱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 매끄럽게 이행되지 않지만, 영화적 감각을 구사한 연출로 폭발적으로 감정선을 전환하며 구구한 의구심을 날려 버린다. 어떻게 카메라를 놀렸는지 신기할 만큼 물리적 논리를 초월한 카메라의 비행으로 중계되는 카체이싱은 다이내믹과 아드레날린이란 낱말의 뜻을 몸으로 깨닫게 한다. 이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토론과 기술과 시간과 비용과 인력과 안전에 대한 도박을 투여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이 장면은 내가 본 한국영화 최고의 자동차 액션이고, 한국 상업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을만하다. 이 장면을 포함한 몇 가지 비범한 연출만으로 <아수라>는 포만감을 안겨줬다. "카체이싱 장면은 볼만하지만"이라고 한 마디로 퉁치고 서사의 개연성만 캐묻는 이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모욕하고 있다. 이 영화는 더 많은 정당한 주목과 더 많은 진지한 분석을 얻어낼 자격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허문영의 딜레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