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이 있다> '실제 상황' 연출 논란
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출연한 서예지 배우가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종용으로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다. 몰래카메라처럼 배우를 실제 상황에 몰아넣거나, 위험한 장면을 연기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요구한 전례는 영화사에 많다. 작년 개봉한 <아수라>에서도 정우성이 김원해를 때렸고, 얼마 전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으며 말론 브란도와 공모해 마리아 슈나이더를 강간했다는 의혹이 일어났다. 이런 일들이 배우 인권침해란 건 논쟁할 가치가 없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렇게 '실재'를 추구한다고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냐는 거다.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는 매체로 태어났다. 그것은 카메라가 '거기 존재하는 것', 렌즈 앞의 풍경과 움직임을 기록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무기는 현실의 리얼한 묘사라 인식되는 한편, 현실의 묘사에서 해방돼 재현의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부재하는 허구를 존재하는 현실로 보여주는 것, 이 존재와 부재 사이의 심연이 영화란 매체의 환영성을 빚어낸다. 영화사의 리얼리즘에 관해 거칠게 말하자면, 관객이 환영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은폐하는 흐름과 영화의 환영성을 고백하고 폭로하는 논의가 있었다.
영화에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을 끼워 넣을 때, 허구를 넘어 현실이 되거나 실재가 출현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는 현실의 재현일 순 있어도 현실 자체가 될 순 없다. 현실이 아닌 것이 현실이란 제스처를 취할수록 환영성이 강화될 따름이다. 물론 영화에서 실감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허구를 현실이라 간주하고 몰입하는 매체와 관객의 암묵적 합의가 성립하는 수단이다. <다른 길이 있다>처럼 어느 한 순간 연기를 실제 상황으로 대신하는 연출은 오히려 영화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몰입의 리듬을 헝클어트린다. 이건 실감을 강조할 때 일어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관객은 영화가 현실이 아님을 안다. 배우가 직접 수행한 위험한 스턴트와 고도의 리얼리티를 살린 세트와 액션 장면을 볼 때, "와 저걸 어떻게 촬영했대."처럼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 허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스펙타클에 반응하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연탄가스 장면이 특별히 사실적으로 재현됐다면 다른 장면에 비해 그 장면의 인상이 불균질하게 남거나, 연기일지 혹은 진짜일지 진위가 궁금해질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논란의 강간 장면에 대해 "나는 그녀가 분노와 수치심을 연기하길 원치 않았다. 진짜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길 원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발상은 꾸며낸 것이 아닌 순수한 진품을 원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뒤집어 말하면, 재현을 현실의 모상이자 현실 보다 열등한 차선책으로 보는 관점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깔고 있다. 이건 현실을 이데아의 모방, 예술을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을 다시 모방한 것으로 폄하하던 수천 년 전 플라톤의 생각이다. 내가 이해하는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거나 현실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재현의 특권은 현실을 재해석하며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다른 현실'의 비전을 현현시키는 것이다.
김여진 배우가 트위터에서 중요한 코멘트를 남겼는데, 이번 사건 같은 "날 것의 반응은 캐릭터의 반응이 아니라 배우의 생리적 반응"이란 것이다.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 고유성과 독립성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연기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그 현실을 사는 캐릭터의 고유성을 빚어내는 기예다. 서예지 배우에게 자신이 해석하고 구축한 캐릭터를 감독의 디렉션을 통해 재현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다고 하자. 감독은 그 가능성을 닫아 버리고 신체적 반응을 뽑아내는 버튼으로 배우의 몸을 대상화한 것이다.
'실제 상황' 연출이 유독 섹스와 폭력, 고통과 죽음을 가시화하는 데 쓰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것들은 본능과 욕망과 실존의 정수, 생의 밑바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고, 실행하고 구경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여준다'는 영화의 속성은 저것들을 다루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창작자들이 고통과 폭력, 죽음과 섹스의 땀구멍을 클로즈업하고 싶은 충동에 끌리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는 보는 자의 권력을 선사한다. 극장에서, 나는 세계를 살아내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구경꾼이다. 세상과 타인이 응시를 통해 대상화되어 개입의 가능성도 개입의 의무도 차단되는 그곳에선 고통도 죽음도 몰락도 모두 남의 일이다. 그것들이 가하는 육중하고 파괴적인 작용은 날아가고 관음의 실감만 남는다. 그러면서 관객은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눈물짓는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보기의 윤리학을 요청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재현의 윤리가 폭력과 고통의 이미지를 우회하길 요청하는 것은 본다는 것이 그만큼 안전한 행위이고 그것들이 가진 무게감과 현실감을 오히려 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영화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보수적인 대답을 갖고 있다. 보는 것의 전능감이 아니라 볼 수 없음의 무력감을 선사하는 영화, 초월적 응시로 대상화된 그 곳에서조차 그렇게 쉽게 안 다고 말해선 안 되는 타자와 존엄과 비밀이 있다고 일깨우는 영화가 아닐까. 진짜 고통과 진짜 폭력과 진짜 섹스. 이런 외설적 상태를 보여줄 목적으로 실제 상황을 전시한다면 그것이 포르노와 스너프 필름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