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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Feb 08. 2017

트럼프 시대의 정확한 타이밍

영화 <설리>에 대한 반대 의견

한국 평단이 <설리>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의아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래된 미국 공화당 지지자다. 그는 우익 파시스트란 칭호를 익히 세례 받았고, 작년 8월에는 “힐러리와 트럼프 중 하나를 고르라면 트럼프”란 발언을 했으며,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공개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타전했다. 이런 인물이 만드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이스트우드는 장르와 서사를 넘어 공동체에 관한 논평을 담는 감독이므로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작가의 정치색에서 작품의 정치색을 도출하자는 논리가 아니다. 만약 그의 작품에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면 하나의 참고 문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콘텍스트로서 텍스트의 직조에 구조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요소다.  


<설리>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은 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설리의 갈등이다. 양자는 1549 비행기가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사고의 사후 조사에서,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해 날개와 엔진이 파손되었던 순간, 공항으로 회항해야 옳았는가 설리가 선택한 대로 비상착수가 옳은 결정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NTSB 조사관들은 별 맥락도 없이 모두가 기뻐하는 기적을 트집 잡는 것처럼 묘사되고, 확정된 결론을 향해 설리를 몰아가는 사냥꾼 같다. 이 구도는 작위적인데다, 각각의 인물들이 대립하는 가치관을 표상한다. 영화를 보면 첫눈에 들어오는 결절점이라 별생각 없이 흘려버린다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에 관한 주류 견해를 대표하진 않겠지만, 미국 slate지에는 이 점을 꼬집는 비평이 실렸다(‘Sully Is the Perfect Fantasy for Our Post-Fact Era’). 실화, 그리고 실화에 대한 수기에 기반을 둔 이 영화에서 NTSB와 설리의 갈등구도는 완전한 허구라는 것이다. 조사관들은 설리를 핍박하지 않았을뿐더러, 회항 시뮬레이션의 유예 시간 35초도 설리가 아닌 NTSB가 제안했다. NTSB의 전 조사관 Robert Benzon은 자신들이 왜곡되게 묘사되었다 지적하며 “우리는 게슈타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NTSB는 관료체제와 공적 부문을 상징하므로 의도가 궁금한 각색이다. 사건 당시 조사관 Tom Haueter는 이런 각색이 정부의 무능력함에 대한 논거로 이용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설리>는 한국에서 흥행하지 못한 영화임에도, 국내 평단에선 많은 비평이 헌사되었다. 나름의 권위를 가진 지면에 게재된, 내가 읽어 본 비평만 7편에 달한다. 그중 한 편의 글도 이 문제에 이의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예찬의 논조를 양분된 경향이 관통한다. 하나는 이스트우드 작가론에 입각한 글쓰기이고 하나는 세월호에 관한 회고다. 이스트우드 같은 거장의 작품을 논할 때 그의 전작을 거명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일은 따로 있다. 그렇게 작가란 좌표에 방점을 찍고 영화를 보면서 왜 작가의 정치성은 말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는 종종 정치적 설화에 휩싸였는데도 말이다. 작년에 일어난 허문영의 이스트우드 애정 철회 해프닝과 연결 지으면 양상은 거의 기이하다. 작가의 정치성을 작품의 콘텍스트로서 가늠하는 대신, 그 무게감에 짓눌려 작가를 포기하려 하거나 아예 없는 셈 쳐버리고 함구하는 것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텍스트와 상관관계에 있는 작가의 정치색은 젖혀둔 채 텍스트와 일차적으로 무관한 한국의 재난사고만 말하는 건 어떤 이유일까. 비행기가 강물 위로 비상 착수하고 155명 승객 전원이 구조된 사건에서, 승객 다수를 구조하지 못한 채 선박이 침몰한 재난을 떠올리는 건 이해할만하다. 거기서 귀감으로 배울 것이 있겠지만 그건 영화가 아니라 1549 불시착 사고에서 배울 일이다. <설리>를 통해 배울 게 있다면 그 사고를 다루는 영화의 문법과 태도다. 몇몇 비평이 승객 전원이 구조된 사건이란 이야기 소재와 세월호를 곧장 대비하며 걸작이라는 상찬을 바칠 때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태도가 영화에 관한 오인일뿐더러, 세월호를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마저 든다.


<설리>가 말하는 바를 압축한다면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긍정과 맡은 자리에서 할 일을 해내는 개인의 윤리일 것이다. 이 두 메시지의 합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보통 사람' 모두가 영웅이라는 영웅주의의 전유가 일어난다. <설리>에 관한 많은 비평이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령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저마다의 직업윤리”라는 이동진의 20자 평이 그렇다. 한편 두드러지는 연출의 장치는 서사의 배열과 플래시백이다. 운항 수단을 활용한 재난 영화가 여행의 시작과 재난의 봉착, 구조와 귀환 같은 선형적 패턴을 흔히 취하는 것에 비해 <설리>는 재난 다음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재난 장면을 세 번의 플래시백에 걸쳐 분산 배치한다. 구조 장면은 다소 어정쩡하고 밋밋한 위치에 삽입하는데, 인명이 걸린 재난 상황을 클라이막스화하지 않은 윤리적으로 좋은 선택이다.


이스트우드는 설리의 과거사를 두 번의 플래시백으로 나머지 플래시백과 병치한다. 플래시백은 과거의 재생이며 때문에 이야기의 숨겨진 퍼즐 역할을 한다. 시간의 역진이 ‘현실’로 봉합되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회고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플래시백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장면인데, <설리>에 나타나는 다섯 번의 플래시백 또한 예외 없이 설리의 시선을 약호로 개시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악몽/환영 장면은 설리의 내면으로 진입하는 이미지, 그의 트라우마와 결부된 순간, 사건의 진실과 연루된 단서란 점에서 다섯 번의 플래시백과 동질의 위상을 갖는다. 이런 연출은 상기의 메시지를 설리 개인에게 수렴하여 내면 드라마로 풀어가는 장치이다. 재난 사건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진실 찾기의 배경 서사로서 주변화된다.


주의할 것은 이스트우드가 설리의 내면적 갈등을 NTSB와의 서사적 갈등과 병존시키며 드라마적 갈등 구조를 이원화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후자는 전자의 한 원인이지만, 설리의 내면 갈등은 삶에 대한 회고와 공동체의 흔들림 등으로 원인이 다양하며 강렬하다. 단순한 구도로 전개되어 역시 단순하게 해결되는 서사적 갈등과 잘 윽물리지 않는다. 서사적 갈등은 엔딩의 공청회 장면으로 수렴하며 설리의 판단과 사고에 관한 진실이 확증되며 해소되고, 이와 함께 내면적 갈등 또한 불문에  부치듯 사라지는 결말로 끝난다. 서사적 갈등 속 대결 구도를 보라. 이 영화의 메시지가 인간에 대한 긍정과 개인의 윤리라고 할 때, 그것은 NTSB와의 대립 속에 대립항으로 성립하는 가치이며, 최종적으로 설리가 옳다고 NTSB에게 ‘승리’를 거두며 공인된다.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을 부정하며 발화되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건 저마다의 직업윤리”라 정리하는 건 의미가 없다.


NTSB가 표상하는 건 시스템과 매뉴얼, 기술문명, 공적 부문이다. 설리가 표상하는 건 인간의 직관과 개인의 소명의식, 그 개인들의 각개약진이 합일을 이루게 하여 완전한 결과를 만들어주는 ‘타이밍’인데, 이는 공적 부문의 통제를 무색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 같은 것이다. 장병원은 영화에 공적 이미지에 대한 대결의식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지만 "<설리>에서 노인 이스트우드는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비판적 접근을 거둔다(씨네21, 클린트 이스트우드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그러나 영화에서 적출된 사항은 그 개인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역할을 마련하고 가치를 규율하는 공적 네트워크의 의의다. 조재휘는 “이스트우드는 시스템을 신뢰하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어떤 위기가 와도 구조될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라고 평하는데(씨네21, '미국의 얼굴' 톰 행크스라는 아이콘) 어떻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비행기를 비상 착수한 설리의 ‘결단’은 매뉴얼 순서를 건너뛰고 관제탑(시스템)의 지시를 거스른 경험과 육감의 산물이란 명징한 사실을 떠올려 보라.


비상사태에서 임기응변이 요구되며 때론 인간의 경험과 직관이 시스템을 보충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양자를 대립적 관계로 설정하지 않아도, 혹은 그럴 때 유효한 이야기다. 설리의 임기응변이 정확한 판단이었는지 따지는 건 차후에 더 정확하고 유연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반대로 그런 단단한 시스템의 지지를 통해 개인의 임기응변도 효과를 낼 수 있다. 설리의 비상착수 후에 승무원들과 NYPD가 매뉴얼에 따라 승객들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이스트우드는 그걸 검증하려는 절차를 한평생 비행기와 살아온 노인의 삶을 부정하려는 시도로 묘사한다. 사건의 사실관계까지 각색하면서 말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40년 간 백만 명의 승객을 태웠는데 208초 사이의 일로 평가받는다는 거야”란 설리의 대사가 그렇다. 이 말은 한 번의 '기적'으로 설리를 구름 위로 띄우고 바닥으로 팽개치는 세간의 태도 모두를 겨냥하는 영웅 신화에 대한 비판이며 설득력 있는 항변으로 들린다. 그러나 설리 '개인'에서 ‘시스템’으로 초점을 옮긴다면, 많은 인명이 걸린 비행 사고에서 기장의 특수한 판단이 평가 대상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공적 부문에 대한 대결의식이란 의심스러운 구도를 가려주는 건 영화에 드리운 불투명한 정조다. 필름을 자욱하게 뒤덮은 우울과 불안의 정조, 그리고 깨끗하게 양단되지 않는 정치적 논조, 특히 영웅주의에 대한 다면적 접근이다. 이것들이 익숙한 주제의식과 단선적 서사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다. 이스트우드는 특출한 결단을 내린 개인의 내적 흔들림을 조명하는 영웅주의 서사 구도를 채택하며 그것이 선사하는 서사적 매력에 천착한다. 그러는 한편 미디어 사회가 소비하는 영웅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고발과 '보통 사람' 모두가 영웅이라는 주제의식을 영웅주의 서사 구도와 길항시킨다. 


<설리>에 드리운 우울과 불안의 정조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압도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고 안개처럼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설리가 겪는 우울함과 불안감은 비행기 사고의 결과로 배태되는 트라우마다. 이스트우드는 그 원인인 비행기 사고를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 중반에 배치하였고 그 결과인 악몽의 이미지, 설리가 모는 1549 비행기가 뉴욕 빌딩숲에 충돌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우혜경은 이 이미지가 실은 불안이 아니라 안도를 나타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씨네21,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 이것은 관제탑의 지시대로 회항했을 때 일어났을 장면이며, 설리는 그를 예견하고 무사히 비상 착수하며 사고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우혜경은 여기서 설리의 불안의 방점이 승객을 구조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비행이 실패한 것이 아닐까에 찍혀있다고 추측하며, <설리>는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이란 추론으로 전진한다.


비상착수가 실패한 비행이라면 성공한 비행은 무엇인가. 설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공항으로의 회항이냐, 허드슨 강으로의 비상착수냐 두 가지밖에 없다. 사고 당시 조종실 상황을 녹음한 음성 파일은 진실의 결정적 퍼즐로써 공청회 장면의 마지막 플래시백으로 시각화되어 펼쳐진다. 이때 "고도 낮음, 지상 충돌주의"라는 경고 메시지가 반복해서 울리고, 설리의 시점 숏 상으로 건물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회항을 감행했을 때 추락할 것은 명확해 보인다. 즉 비상 착수 의 성공한 비행의 가능성 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설리는 조사관들에게 이 정황을 강조하는 대신 자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번민에 휩싸였다. 


이렇게 어긋난 구도가 생겨난 까닭은 뭘까. 진실이 밝혀지는 공청회 장면에서 설리의 판단을 반론의 여지가 전무한 것으로 과시하는 데 힘을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트우드가 공동체에 관해 '가상의' 대립항을 맞세우고, 하나에는 부정적 함의를 다른 하나에는 대안적 함의를 담으며, 하나가 하나를 극복하며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상징체계를 엮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악몽 이미지와 설리의 비상착수는 영화에 설정된 대립항 ‘NTSB 대 설리’와 그대로 연결된다. 전자는 시스템의 지시대로 회항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이며 후자는 그것을 거부하며 얻어낸 결과다.


<설리>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이미지로 시작했다가 그 추락을 회피하며 무사히 착륙하는 플래시백으로 끝나는 대구 구조를 취한다. 35초의 유예시간을 넣은 회항 시뮬레이션은 저 추락의 이미지가 실제로 구현되었을 ‘현실’이라 입증하는, 악몽을 현실화하는 결말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1549 추락 이미지가 9.11을 연상케 하는 것이 자명하다면, 이것은 공동체를 습격한 추락과 불안을 비상과 희망로 재편하고 치유하는 기획에 다름 아니다. "뉴욕에서 비행기로 좋은 일이 일어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는 시민들의 말처럼 허드슨 강의 기적을 공동체의 희망으로 온전히 정초하는 것이다. 오프닝 직후 설리는 NTSB에게 조사 받으며 “추락이 아니라 비상착수였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선택 아니 공동체의 악몽을 실패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있다. 


이스트우드는 ‘보통 사람’의 대명사 같은 얼굴, 그래서 가장 미국적인 얼굴 톰 행크스를 주역으로 기용해 설리란 인물에게 국가와 역사의 상징적 맥락을 포갠다. 반복하여 이어지는 설리의 달리기 장면은 젊은 시절 톰 행크스가 출연한 <포레스트 검프>의 끝없는 달리기를 불러온다. <포레스트 검프>는 포레스트 검프란 인물 위로 미국 현대사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은 영화다. 시대는 흘렀으며 영웅은 늙었고 공동체는 위기에 처했다. 이제 달리기는 초강대국의 현대사를 이룬 근면한 질주가 아니라 상처와 두려움을 떨치려는 안간힘이다. 뉴욕 도심을 달리던 설리가 강가에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바라보는 건 미국의 영광을 수호해 온 전투기다. 설리의 회상 속에서 그는 사고에 처한 전투기를 무사히 착륙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오늘의 추락 앞에서 과거의 비상을 떠올린다. 거기서 가물 거리는 건 강한 공동체를 향한 향수다. 


문제는 한국에서 <설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많은 관객과 평론가가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진도 앞바다의 비극’을 떠올렸다며 벅찬 기분을 토로했다. 세월호는 시스템의 실패, 매뉴얼의 미준수가 빚은 참극이다. 1549 불시착 사고는 세월호와 많은 부분 대조된다. 그러나 개인의 특수한 결단을 클로즈업하며 공적 부문의 무능함과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제한적이다. 심지어 구조 장면이 주변화되어 극의 일부에만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설리>는 보는 내내 부끄럽다. 이 영화는 우리가 세월호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거의 모든 쇼트에서 내내 물어본다.”(정성일)라고 말할 때 거의 당혹스러운 기분이 든다. 승객 전원 구조란 설정에 감응해 “올 해의 베스트 영화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정지연,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라고 영화적 평가를 바치고, “<설리>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 앞에 도착한 영화”(FANTASY, 상승의 숏이 출현하는 순간)라며 황홀한 기분을 고백할 때, 그런 태도가 <부산행>, <터널> 같은 재난영화가 세월호를 다루는 소재주의와 멀다고 할 수 있을까.


평자들(FANTASY, 장병원)이 말하듯, 이스트우드는 비행기 운항과 사고, 구조 장면의 플래시백에서 시점을 분산하며 거기 연루된 개개인의 개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설리는 영화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시선이 공존하는 모순과 어긋남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영화다. 안도감과 두려움의 자리는 뒤바뀌어 있으며, 우울과 불안의 자욱한 안개는 단선적이고 상투적인 엔딩으로 잘 수습되지 않고, “그들도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대범하게 말하는 한편 ‘그들’의 시뮬레이션 조사를 “컴퓨터 게임”이라 폄하한다. 이스트우드는 절묘한 ‘타이밍’이 이룩한 시민들의 연대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공적 부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각이한 주체들의 매뉴얼에 따른 헌신을 보여주면서 매뉴얼을 거스른 결단의 정당성을 웅변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충돌은 트럼프의 인종 차별 발언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트럼프의 당선에 환호한 인간 이스트우드의 그것과 조응한다. 구조 장면에서 강조되는 건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그의 딸, 다리를 저는 노인과 젊은 아들, 달리기의 동력을 잃고 상처 입은 전통을 지탱할 백인들의 피로 맺은 유대감이다.


<설리>는 마치, ‘보통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민주주의의 본령으로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 2016년 미국을 영화적 미문으로 꾸민 시대상처럼 보인다. slate지에 실린 이 영화에 관한 비평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공격하며 브렉시트를 이끈 마이클 고버의 “이 나라에는 전문가가 너무 많다”는 말을 인용한 것에 수긍이 간다. 정부와 관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며 '보통 사람'들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건 포퓰리스트의 논법이다. 엘리트에 대한 적대감과 포퓰리즘이 이룩한 트럼프와 브렉시트의 시대에 이 영화가 나타난 건 우연일까. 어쩌면 그 스스로의 말처럼, <설리>는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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