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혼다>
"남이야 어떤 사랑을 하건, 왜 미개하게 오지랖인가”라고 한 마디로 치부하는 관성이 있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결부된 윤리적 의제는 간단하지 않다. 배우자를 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더 값진 사랑,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싶은 실존이다. 도덕을 넘어 관계의 문제이며 관계엔 타인의 개입을 밀어내는 당사자들 만의 행간이 있다. 제삼자가 왈가왈부하기 곤란한 이유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배신하고 고통에 빠트리며 얻는 행복이기 십상이므로 도덕적 쟁점이 씻어지지 않는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외도는 권장할만하거나 떳떳한 일은 아니다. 그것을 용인하는 경우에도 '어쩔 수 없다'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남의 외도에 관해 구경꾼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난은 '외면'에 불과하겠지만, 최대한의 호의도 '침묵'이 고작이다. 그것이 도덕이 결부된 사생활의 딜레마다.
그런데 홍상수가 자신의 외도를 극화한 것이 틀림없는 영화를 세상에 선보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타인의 관계를 규정할 순 없고, 관계의 양상은 미묘하고 고유하지만, 적어도 이 경우엔 홍상수에게 건 기대가 부서지며 좌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홍상수의 아내 혹은 자식은 자신이 겪은 현실이 사람들 앞에 전시되고 아픈 기억을 상기하길 강요 당한다. 무엇보다 어폐가 큰 점은 그것이 상처를 안겨준 사람의 관점으로 각색되어 관객들에게 소비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아름다움에 도취하려면, 홍상수 가족의 존재감, 그들이 겪은 아픔을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된다. 이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연루자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관객은 더 이상 타인의 사생활에 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면 족할 제3자가 아니다. 도덕적 쟁점이 걸린 사건을 옮긴 스크린과 대면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가중하는 걸 용납하는 '당사자'가 된다.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이 많을수록, 예술 앞에 외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홍상수 가족의 심정이 쓰릴 거란 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 아픈 기억을 상기하게 한다는 사실 만으로 그 영화에 윤리적 의제를 제기하긴 힘들지만, 홍상수는 그들에게 도덕적 책임이 걸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미 세상에 사건의 얼개가 공개된 경우라도, 그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공론화하는 것이 옳은지, 자신의 영화로 연출하는 것이 적절한지 고민이 필요하다. 즉 이 영화를 보는 관객 저마다에겐 나름의 윤리적 입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생각이 미치지 않고, "김민희 연기 기대된다." "홍상수 신작 빨리 보고 싶다."라고 기대감을 표명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영화란 매체의 속성과 윤리성에 둔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는 사건의 당사자, 홍상수와 김민희가 자신들의 행각을 ‘이야기’로 바꾸고, '예술'의 차원으로 옮겨놓으려 했기에 벌어졌다. 그로부터 모종의 표백과 윤색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자명하다. 나는 외도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겐 그렇게 비난할 자격도 없다. 그런 문제 때문에 홍상수와 김민희의 작품 활동이 중단되어선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복귀작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저렇게 노골적으로 재연해야 했을까. 사실은 그건 두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벌써 이 점에 창작자의 윤리적 태도가 걸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