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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Jun 20. 2017

<옥자>가 품은 무서운 전언

<옥자>, 넷플릭스, 멀티플렉스

"'옥자'와 넷플릭스는 피해자일까?"


<옥자> 논쟁은 아래와 같은 주장이 맞서며 이뤄지고 있다.


"김성욱 서울 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CGV가 주장하는 (한국의) ‘유통구조를 흐린다’는 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8일 페이스북에 썼다."


"강유정 영화 평론가는 “애초에 플랫폼이 다른 영화인 ‘옥자’가 극장 측에 상영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고, 계속 고집할 수 있는 주장도 아니다”라고 했다."


평소 멀티플렉스의 전횡을 지적하던 영화계 인사들과 대중 여론은 관객의 ‘볼 권리’를 인용하며 멀티플렉스를 비판한다. 나는 강유정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논쟁은 CGV 등 멀티플렉스가 <옥자> 상영을 거절하며 열렸는데, <옥자> 상영을 요구하며 넷플릭스에 동조하는 입장에 선 이들이, 정작 넷플릭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을 편다는 사실이 재밌다. 넷플릭스로 볼 수 있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틀어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때, 그 사실로 관객의 ‘볼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까지 말할 때, 그건 극장산업의 공공성과 극장 관람 경험을 특권화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걸 위협하는 게 바로 넷플릭스고 <옥자>는 한국에 상륙한 첨병이다.


<옥자>를 왜 극장에서 틀어야만 할까. 나름의 논거를 떠올릴 수 있다. 1)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모니터로 보는 것으로 만회할 수 없는 특별한 감흥이 있다. 2) 극장은 영화에 대한 대중적 접근성을 보장하므로 공익적 역할이 있다. 1)과 2)는 누구나 동의할만한 논리이고, 극장산업은 이 기반 위에서 존립해왔다. 이걸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는 것이 극장을 배제하며 영화를 독점 배급하는 넷플릭스란 플랫폼이다.


논쟁의 층위가 엉망으로 엉켜있는데, CGV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뜯어보면 전부 사안 자체가 아니라 CGV가 저지른 과거의 전횡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김성욱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으면 난감한 기분이 든다. 그는 현재 극장의 독점적 상영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없으며 멀티플렉스가 주장하는 ‘관행’은 그들의 영화산업 독점을 지탱해 온 주적이라 말한다. 그는 서로 다른 개념과 행태를 ‘관행’이란 말로 등치하며 상대의 도덕적 권위를 뺏는 논리 오류를 저지른다. CGV가 말하는 관행은 개별 영화를 극장이 먼저 틀고 난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IPTV로 배급하는 일이다. 이 관행은 멀티플렉스가 나타나기 이전, 비디오테이프 시절부터 보장되어오던 극장의 보편적 권리다. 이것이 스크린 독과점과 수직계열화 등, CGV의 시장 독과점을 구축해 온 ‘관행’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더 난감한 건 김성욱이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권리’, 극장의 공공성이란 테마를 논거로 삼는다는 사실이다(알 권리는 주로 정부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말하고, 정보공개 청구권 등으로 법제화되어 있다. 볼 권리는 어디서 가져온 족보 없는 소린지 모르겠다). 그간 CGV가 스크린 독과점과 티켓 가격 인상 등으로 극장 공공성을 도외시해 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안에선 오히려 그것을 방어하는 스탠스에 있다. 그들의 속셈이 사익에 있건 공익에 있건 그와 무관하게 말이다.


<옥자>의 경우처럼, IPTV와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사례가 확대된다면 굳이 극장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고 극장 산업은 위축된다. 영화는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는 게 진수라는 관념, 그러니까 극장이란 장소의 고유한 쓰임이 흔들릴 것이다. 게다가 넷플릭스가 영화 산업에 자리 잡아 극장을 거치지 않는 개봉작이 늘어난다면, 넷플릭스에 가입하지 않은 관객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다. 이 점은 디지털/미디어 리터러시가 떨어지는 계층과 세대에게 직접적인 타격이다. 극장은 누구나 발품만 팔면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문턱이 낮은 공중 장소다. 극장의 ‘공공성’은 이 점에도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렇듯 극장이란 장소의 고유성과 공공성을 훼손한다는 것이 칸 영화제에서 넷플릭스 배급작을 비토하는 입장이 있었던 행간일 것이다. 정말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CGV에 앞서 넷플릭스부터 문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성욱이 자가당착에 빠진 건, <옥자>란 영화 한 편을 극장에서 트는 것과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보편적 권리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는 <옥자>를 틀어줄 의무가 없다. 극장과 넷플릭스는 플랫폼이 다른 매체다. 극장을 경유하지 않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배급해 “내 손 안의 극장”을 세우겠다는 것이 넷플릭스의 전략이지 않은가? <옥자> 역시 그런 기조 아래 제작된 영화다. 봉준호가 한국 극장에서 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넷플릭스가 수락했다고 해서 멀티플렉스가 응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이건 TV 드라마를 극장에서 틀 의무가 없는 것과 같다.


김성욱은 IPTV 영화를 극장에서 동시에 틀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하도록 논의하자고 한다. 그런 대안은 정작 넷플릭스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는 <옥자> 상영과 함께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상영하는 ‘넷플릭스 특별전’을 기획했지만, 넷플릭스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이 일화는 <옥자> 극장 상영은 넷플릭스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의 예외적 마케팅임을 알려준다. 그들 역시 극장과 콘텐츠를 공유하는 일은 콘텐츠의 독점성을 떨어트리기에 내키지 않는 것이다. 일부 여론은 돈 들여 만든 한국 감독의 영화를 그 국민들과 공유하는 ‘착한 호구’ ‘피해자’의 위치에 넷플릭스를 놓고 멀티플렉스의 횡포라는 틀에 박힌 서사에 사태를 대입하는데, 얼마나 무디고 단순한 시각인지 알 수 있다.


강유정은 극장용 영화와 IPTV용 영화를 이원화하여 제작하는, “플랫폼에 영화 내용을 최적화”하는 탄력적 대응을 대안으로 주문한다. 강유정이 주문하지 않아도 산업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나는 넷플릭스가 예상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껏 지속된 흐름을 증폭하거나 극대화하겠지. 지금도 한국 극장가는 대작 위주로 돌아간다. 볼거리가 약한 드라마 중심의 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런 영화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다운 받아 보거나 관심사에서 빼고, 극장에선 블록버스터 무비 티켓을 끊는다. 넷플릭스가 다다를 종착지에서, 드라마는 IPTV 속으로 들어가고, 영화관은 스펙터클을 위한 유원지가 될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미 미국에선 본격화되었다. 할리우드 제작사는 히어로 무비와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을 극장에 퍼붓는다. 이런 영화들이 한국에서도 대중적 인기와 마니아를 모은 지 오래됐다.


문제는 한국의 산업적 조건이다. 한국 영화계는 할리우드처럼 블록버스터를 뽑아낼 자금력이 없다. 내수 인구도 작고 해외 시장도 충분치 않다. 큰 맘먹고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제작해봤자 할리우드의 스케일을 쫓아가기엔 가랑이가 너무 짧다. 봉준호는 <옥자>를 “한국에서 제작하게 되면 50~60여 편의 다른 영화를 제작하지 못하게 된다. ‘설국열차’ 당시 다른 제작자로부터 ‘너 때문에 다 멈췄다’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양국의 산업 규모를 정확하게 대조한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영화산업의 핵심 경향은 여름철 텐트폴 무비의 흥행과 중소규모 제작비 영화의 부진이다. 전통적으로 외화는 한국영화가 부진할 때 반사이득을 얻었지만, 근래에는 제작 규모와 성수기/비수기에 따라 둘쑥날쑥한 한국영화 점유율보다 탄탄한 점유율을 이뤄냈다. 극장을 스펙터클의 유원지로 재개발하는 흐름이 한국 영화계 바깥에서 밀려오고, 관객이 영화를 소비하는 감각과 기준은 이미 변해가고 있다. 스크린은 다수의 할리우드 대작과 소수의 한국 대작에 할당될 것이며 그 결과 스크린 독과점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한국 영화 흥행작이 줄어들고 편중되는 가운데 영화 산업의 자생력은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다. <옥자>가 던지는 전언은 ‘극장’과 ‘넷플릭스’라는 쟁점 보다 훨씬 깊고 서늘한 곳에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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