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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15. 2016

평화 시위의 이데올로기

평화 시위 이데올로기에 관하여.     


폭력 시위를 공권력을 향한 물리적 타격으로 정의한다면, 폭력/평화 시위에 관한 논점은 몇가지로 추려진다.     


1) 현 정국에서 시위대가 폭력을 수행하는 게 가능하거나 원활한가

2) 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이 정국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가

3) 도움이 되는 것을 떠나 폭력과 평화, 둘 중 어떤 노선이 정당한가, 혹은 둘 중 하나를 택하자는 논란은 왜 일어나는가.     


1)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돈된 방식으로 조직적 타격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그건 일반적 시위의 범주를 넘어선 요구다. 차라리 테러나 게릴라, 민병대의 군사 작전에 가깝다고 할까. 통솔체계 없이 무분별하게 터져 나오는 폭력 또한 시위대의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원론적으로 정국에 압력 작용을 가할 수 있다.     


2)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여기는지 글의 말미에 이르러 설명하겠다.   

  

지난 주말 수도 한 복판에 무려 백만이 넘는 군중이 집결했다. 이렇다할 통솔 체계도 없었던 것 같고, 정국의 형세와 여론의 분노, 집결된 군중의 숫자를 감안하면 사실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지난 주말의 역사적 시위는 “부상자도 연행자도” 발생하지 않은 역사적 ‘평화 시위’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왜 군중은 폭력 대신 평화를 택했는가, 3)을 물어야 한다.     


현재 한국 공론장에서 폭력 시위에 대한 터부와 평화 시위에의 요구는 뿌리 깊다. 나는 이런 상황이 큰 틀에서 서구와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런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 불바다를 방불케하는 폭력 시위가 펼쳐지고 있는 사진을. 이런 사례는 한국의 폭력 시위가 과도하고 후진적이라는 보수 세력의 공격을 손쉽게 받아칠 수 있는 카운터 펀치다. 서구 근대사를 잘 아는 편이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평화 시위에 대한 관념은 너무나 뿌리 깊다고 판단되어서 그를 더듬기 위해 피상적·상식적 수준에서라도 보편화된 비교 대상을 끌고 오고 싶다.     


서구는 자유주의와 법치주의의 전통 아래 시민 혁명, 사회 계약, 저항권 같은 개념을 정립하며 국가와 국민의 서열 관계, 국가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개념과 현실 양면으로 열렬하게 실천하며 근대를 열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국민 주권 개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헌법의 판타지처럼 목 메어 부르짖곤 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우위를 뜻할 것이다. 서구 사회는 시민 사회의 역동적 움직임으로 전진하고 확장돼왔다. 멀리는 대헌장부터,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 파리 코뮨, 여러 노동 쟁의, 사회주의 운동, 여성주의 운동 등 지배 권력에 맞서 급진파와 온건파가 바통을 주고 받으며 새 체제를 세우고 권리를 쟁취한 장구한 역사다. 그들은 국가 강권력에 대항해 물리력을 집행하거나 공권력을 패퇴시키고 해방구를 소환하거나 왕의 목을 따고 광장에 내걸었다. 달리 말해, 경우에 따라 국민이 공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음을 깊고 넓게 합의한 것이다.   


한국은 아래로부터 위를 뒤엎은 경험이 없는 사회다. 왕조가 왕조로 대체됐고, 기득권 엘리트를 신흥 엘리트가 교체하는 방식으로 새 체제가 건국됐다. 아래로부터의 항명은 파편적이고 산발적인 양태로 표출되었고, 화적·역도의 이름으로 진압 당하며 미완의 발버둥에 머물렀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19세기 말 동학 농민군이 있을 텐데, 전례없는 병력의 이 대규모 봉기는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소탕 당했고, 혁명을 꿈꾼 민중만큼이나 외세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한 백성들로 전래되고 있다. 한국은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근대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이식했고, 주권 개념과 국가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도 사회 기층에 잘 견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4.19와 광주 항쟁, 6월 항쟁처럼 헌정 수립 이래 몇 차례 대규모 항쟁이 있었지만, 무언가를 빼앗고 새로 세우기보다 수복하고 바로 세우는 방어적 성격의 항쟁이었다. 시위대는 크고 알기 쉬운 대의를 공유했다. 제도권 학교와 인터넷 광장에서 학습된 민주주의에 대한 교리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는 민주화 항쟁을 숭고한 기표로 전승하였고, 시위 현장에서 튀어 나왔을 폭력 행위 등 군중 행동에 대한 현실적 이해는 사상되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권위주의 정권 아래 형성된 강한 국가주의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공권력은 국가의 물리적 현신으로 이해된 건 아닐까. 국민이 국가에 대해 우월하다는 개념이 흐릿한 채 국민이 국가에 종속되거나 헌신해야 한다는 관념이 또렷했으니 공권력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그에 맞서는 걸 죄악시한 건 아닐까. 이것이 분단국가 반공주의 아래 국가를 향해 폭력을 쓰는 자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끄나풀(빨갱이)이거나 체제가 보호해 줄 필요 없는 불평분자(운동권 학생, 노동조합)이거나 하여간 공권력이 아량을 베풀 자격 없는 비국민으로 낙인 찍혀 가차없이 진압 당했을 거다. 민주화 항쟁의 신화적 전승과 강한 국가주의. 이식된 근대 사회에서 이 둘이 결합하며 폭력을 적출한 ‘아름다운 시위’란 관념의 토대가 되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이상이 ‘폭력 시위’를 터부시하는 전통적 논리라면 사회운동이 몰락세에 기운 00년대 이후론 양상이 변주되는 것 같다. 논점과 관련해 2000년대 초입의 가장 큰 경향은 대학 사회에서 운동권 학생회의 퇴장과 반권 학생회의 등장, 온라인을 통해 조직된 촛불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 문화의 도착이다. 87년 민주화 투쟁의 광장은 전위 조직 운동권이 선도했다. 2002년 수십만 인파가 몰려든 ‘효순이 미선이’ 촛불 시위는 운동권에 대한 비토 정서가 대두된 가운데 ‘앙마’란 네티즌의 발의로 시작해 자발적 조직화로 결집했다. 이 구도는 전대의 시위 문화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가운데 시위 문화와 시위대 인적 구성이 교체되는 큰 그림을 드러내 준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에 이르러선 비폭력에 대한 요구가 명확히 분출된다. 나는 이것이 군중 개개인의 시그널의 송출이며 일종의 신원증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낡고 불온한 운동권이 아니다. 국가를 정상화하러 나온 ‘평범한 국민’이다. 그러므로 나는 폭력을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복원하려는 국가 질서에 반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가사의 노래 ‘대한민국 헌법 1조’가 광장에 울려 퍼졌지만, 실은 군중은 자신이 곧 국가라고 여긴다기 보다, 국가란 큰 타자의 적자임을 순종을 통해 간증하려한 건 아닐까. 한편 과격 시위의 배격에는 촌스럽고 우악스런 시위 문화, 그런 시위를 주도하던 세력의 가치관과 선을 긋고 자신들의 새로운 광장을 열겠다는 미학적 자의식도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정리하자. 평화 시위에의 요구는 자신이 선량하고 떳떳한 국민임을 비폭력이란 형식으로 증명하려는 고집이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시위 참여가 정당하다고 입증하려는 것이다. 집회와 시위는 사회 제도와 의회 정치라는 정상적·고정적 통로가 해소하지 못하는 삶의 요구를 직접 해결하려 거리로 뛰쳐나오는 결행이므로 근본적으로 역동적이고 형식 파괴적이다. 비폭력이란 형식으로 끊임없이 대오를 자기 검열하고 수축시키는 건 강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지난 주말 집회에 백만 명이나 모였음에도 부상자와 연행자가 없었다거나, 폭력과 무질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굉장히 이상하고 병적인 현상이다.     


한편으론 약간의 의구심도 든다. 정말로 현장에선 어떤 소요와 폭력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백만이란 숫자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집회 당일 밤에는 경북궁 인근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다만 이런 작은 뉴스가 주목받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폭력 발생의 토씨 하나에도 확대경을 갖다 대던 보수 언론은 관대하게 넘어갔다. 지금은 시위대와 이해관계가 얼추 일치하니까 말이다. 현장에서의 충돌이 작은 규모에 머물렀던 것도 정부가 극도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경찰이 진압을 자제한 배경이 있다. 시위대 내부와 시위대를 지지하는 인터넷 여론 안에선 경찰에 대항하려하는 이들이 프락치라는 의혹이 퍼졌다. 앞서 설명한, 권위주의 체제가 잉태한 “국가를 향해 폭력을 쓰는 자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끄나풀”이란 관념과 교차한다.     


집회가 너무 평화로와 무의미하니 폭력을 불사하자고 선동하는 말처럼 들릴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는 현 정국에서 ‘평화’가 가장 유효한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가능한 기록적인 숫자의 결집으로 정부와 외신에 다수 여론의 의중을 엄중하게 알릴 것이 요청된다. 한국은 이미 폭력적 시위를 터부시하는 이념이 지배적인 사회다. 폭력 시위를 수행할 의사가 있는 많지 않은 사람 보다, 평화 시위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국민은 탈루당한 주권을 되찾는 국가 정상화를 명령하고 있다. 체제의 질서를 복원하려면 체제가 그어놓은 정당성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유리한 전략이다.     


다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백만 명이 모였음에도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 계속해서 재연될 수 있을까. 백만 명이 모였음에도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차후의 더 작은 군중이 모일 시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을 비난하는 규범으로 쓰이진 않을까. 경찰과 보수 언론은 언제까지 지금처럼 너그럽게 양보할까. 폭력과 비폭력을 택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시위 현장은 얼마나 될까. 무리한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철거민들이 ‘도심 테러리스트’라 규정당한 전례는 평화 시위에 대한 사회적 강박과 과연 무관할까. 역사와 동시대 다른 사회를 참고할 때 변화의 어떤 국면에선 폭력이 유효하고 필연적인 수단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배 질서가 던져 놓은 비폭력 시위란 바늘 구멍 프레임을 통과하려는 노력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까. 길게 보고 답해야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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