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멸칭에 반대하며
내가 ‘병신’이란 말을 입에서 거둔 건 몇 해 전 일이다. 그해 겨울은 춥고 모질었다. 세상의 즐거운 일들은 나와 멀리만 있었고, 웃음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 타인의 전유물이었다. 나는 사람에 치이고 전망에 허덕였다. 늘 불화와 예민함에 시달렸고, 그래서 대개 혼자였다. 우울함과 무력감의 기약 없는 표류.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진창에서 지푸라기를 움켜잡듯 심리 상담센터를 찾았다. 웃음은 멀고 험한 구비를 건너서야 돌아왔다. 일상의 행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갯벌에서, 나는 껍질 잃은 조개처럼 움츠려 있었다. 그때 내가 알게 된 것은 언어의 무서움이다.
‘병신’, ‘정신병자’. 우울증이란 마음의 감기는 남모를 자격지심이었다. 지하철 좌석의 같은 편에서, 캠퍼스의 강의실 한 편에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면에서. 누군가 입버릇처럼 던지는 모멸의 언어는 껍질을 잃고 헐벗은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 침체의 시간 동안, 나를 겨냥하지 않은 언어가 나를 향한 둔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병신’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내가 치기 어린 짝퉁 니힐리스트라서가 아니다. 나 자신이 보증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찾으려 드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세상이 타락한 악한들의 소굴만은 아니라는 믿음 역시 가지고 있다. 타인의 선량함과 야비함을 판단하는 나의 준거는 나 자신이다. 아마도, 편견의 언어는 악의 없이 누적되고 구조의 압력으로 경화된다.
장애는 그이의 잘못으로 인한 형벌이 아니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사건일 뿐이다.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장애의 곤란을 가중하는 건 ‘찾아온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편견이다. 자각 없는 비하의 언어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사회로 돌아오는 협로를 막는 돌무더기다.
누군가를 ‘병신’이라 조롱할 때, 그 말의 진정한 효과는 누구를 향해 작동하는가. 힘껏 미움을 담아 ‘정신병자’란 멸칭을 뱉을 때, 그 말은 과연 누구를 모독하는가. 우리는 내가 손가락질하는 그가 정말로 ‘병신’이나 ‘정신병자’는 아니란 걸 안다. 실재하는 것은 ‘병신’과 ‘정신병자’라는 말로 표상되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의 정체성이다. 내가 혐오하는 것들의 인격적 결여를 증명하기 위해선 그 비유의 텃밭이 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한없이 비천해져야 한다. “이런 ‘병신’ 같은 인간 같으니.” 내 일상의 적대자를 공격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의 장애를 동원할 때 장애는 열등한 결핍으로 확정돼 버린다. 내 곁의 ‘병신’을 조롱하는 매 순간, 우리는 편견의 난지도에 폐기물을 더하는 공범이 된다. 폭력을 감각하는 감수성은 그렇게 둔탁해진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종종 출구 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병신’이란 말의 올바름을 두고 문제를 지적하는 이와 반발하는 이의 옥신각신이다. 나는 이런 항변을 목격한 적이 있다. “‘병신’이란 말이 장애인 비하어라면 ‘지랄’은 간질 환자를 욕보이는 말이고 ‘염병’은 장티푸스 환자를 비웃는 말이냐.” 갖은 욕설의 어원을 들먹이며 멸칭의 위키피디아를 저술하는 동안, 어느새 처음의 쟁점은 몰각돼버린다. 남는 건 논점 없는 감정싸움과 언어의 사용권을 둘러싼 지루한 멱살잡이다(실제로 간질은 ‘병신’을 쓰지 말자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뇌전증으로 병명을 바꿨다. ‘염병’은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연상 정도에서 ‘병신’과 나란히 둘 수 없다). 이 언쟁이 건설적 결착을 맺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병신’이란 비하어를 발화하는 이에겐 장애인을 모독할 의도가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럼에도 언어의 여과를 주장하는 이들이 권유가 아닌 규탄으로 계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중요하다. 합의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이므로.
말하였듯, 나는 ‘병신’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윤리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의 처지의 솜털이나마 ‘나’의 처지로 경험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 또한 숱한 멸칭의 조어에 정념을 투사하였을 것이다. 익숙하고 몸에 붙은 말은 성찰과 자각을 거부한다. 어쩌면, 누구나가 그러할 것이다. 비하적 함의를 지닌 말을 근절해야 할 목적은 편견과 소외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특정한 언어의 미점유 상태를 앞세워 타인의 악의를 추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선의를 믿지 않지만 악의의 창궐 역시 믿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나의 ‘아픔’이 아닌 것 또한 똑같은 ‘아픔’임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구도 타인의 ‘아픔’을 경멸하기 위해 천하고 속된 말을 입에 달고 살진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비하어의 현존은 그 말을 사용하는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 산탄총의 파편 같은 야멸찬 언어를 지각하지 못하는 언어적 관습과 사회적 인식의 문제다. 모두의 성찰과 모두의 고민을 요청하는 모두의 과제다.
최근 의미심장한 구설수 두 개가 공론장의 수면 위로 넘실거렸다. 이른바 ‘인문 병신체’ 비판과 ‘JM 미팅’ 논란이다. 지식인들의 오만한 현학을 대중이 질타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알 수 없는 건 하필 그 조롱의 낙인이 ‘병신’을 인식표 삼는다는 사실이다. ‘인문 병신체’에 대한 혐오가 누적될 때마다 더불어 누적되는 것은 ‘우리’와 다른 장애에 대한 혐오다.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이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장애를 흉내 내며 친목을 도모하는 순간 ‘장애’에 대한 편견도 두터워진다. ‘인문 병신체’란 네이밍의 통쾌함에 환호하고, 누군가를 흉내 내며 즐거워하는 동안 우리는 죄의식 없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
현실에서 장애인들을 막아서는 담벼락은 언어 자체라기보다 사회의 구조와 체제다. 황폐한 언어를 삼가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혁할 순 없다. 그러나 황폐한 언어는 황폐한 세계의 촉매다. 고작 모질고 눈먼 한 두 마디 주의 하는 것으로 누군가에 대한 차별이 조금이나마 감쇄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그 차별을 방관해야 하는가. 오늘도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말이 오가고 사라진다. 그 언어의 명멸 속에 누군가는 상처 입고 누군가는 즐거워한다. 언어는 냉담하지만 또한 다정한 것이다. ‘애자’, ‘병신’, ‘정신병자’. 이 글이 장애와 비장애 사이 단절의 언어를 몰아내고, 가교의 언어를 세우는 약속과 권유의 헌장이 되기를 바라며. 나 자신과의 약속 역시 이렇게 날인해둔다. (201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