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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pr 17. 2017

Respect for Tiger 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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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드렁큰 타이거의 음악을 듣고 힙합에 입문했습니다. 공연장에 처음 간 계기도 타이거 JK의 콘서트였고요. 그는 저에게 힙합이라는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준 존재입니다.


저는 타이거 JK가 한국 힙합이란 영토의 파이오니어(개척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언더그라운드의 상징적 파이오니어가 MC 메타라면 오버그라운드에선 타이거 JK라고 생각해요.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힙합은 여러 차례에 걸쳐 대중화되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쇼미더머니> 시즌이 열리기 전까지 이만큼 메인스트림은 아니었죠. 그 사이 시간 동안 미디어에서 대중과 힙합의 접점을 만들고 유지해 온 사람들이 무브먼트 크루고, 그 수장 JK입니다.


정확한 기억인지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드렁큰 타이거는 힙합의 형식과 내용을 충실히 지키면서, 또한 장르 음악 뮤지션의 노선을 걸으면서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MC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 발표된 'Good Life'지요. 사랑 노래 가사로 장르를 희석한 것도 아니고, 후렴구에 보컬을 초빙한 것도 아니고, 힙합이니까, 힙합이기에 다룰 수 있는 가사의 자의식과 다양성을 담은 트랙입니다. 비트 역시 회색 빛깔 하나 안 섞인 먹통 비트예요. 여러 뮤지션이 얘기한 적 있지만, 00년대 가요 차트에서 이런 음악이 성공한 건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순수한 힙합 트랙이 멜론 차트 1위를 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요즘도 'Good Life' 같은 트랙이 뮤직뱅크 1위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웨거 가사 관습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JK의 가사엔 늘 과시보다 비애가 묻어있고요. 하지만 그는 랩을 무기로 미디어에서 성공을 쟁취한 최초의 랩스타 중 하나입니다. 랩스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리네어 레코즈 보다 한참 앞서 말이지요. 그가 만년까지 겪은 기획사와의 알력과 그로 인한 불우한 사건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JK의 짝패였던 DJ 샤인, 업타운의 스티브와 카를로스, 바비킴 같은 교포 출신 래퍼들 대부분은 한국말 가사를 쓰는 데 서툴렀습니다. 드렁큰 타이거도 1집 앨범을 김진표 a.k.a JP에게 고스트 라이팅을 맡겼지요. 하지만 JK는 부단한 노력 끝에 2집부터 스스로 가사를 썼고 DJ 샤인의 파트까지 대신 써줬어요. 그런 노력은 4집 이후의 후기작에 이르러 나름의 가사적 경지를 이룩하는 쾌거를 이루지요. 이런 배경은 그가 스스로를 향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긍지 높은 뮤지션이란 걸 알려줍니다.

한때는 JK가 자연스러운 한국말 구사에 서툴다는 이유로 “유치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라 비하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피상적 선입견에 불과합니다. JK는 이미 3집에 실린 ‘뽕짝 이야기’에서 이채롭고 디테일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였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의 애착은 4집의 ‘One한’과 5집의 ‘편의점’을 거쳐, 7집의 ‘매일 밤’ 시리즈와 ‘hollywood'에서 정점에 이른 결과물을 남깁니다. 저는 4집의 ’ 엄지손가락‘ 5집의 ’Liqour Shot' 7집의 ‘내가 싫다’만큼 삶에 대한 촌철살인의 구절이 담긴 가사를 한국 힙합에서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현재 활동하는 MC들과 다른 장르 뮤지션을 아울러 JK 만큼 라이브 무대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퍼포머를 본 적이 없어요. JK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실 거예요. 그의 공연은 ‘라이브를 잘 한다’는 것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다이나믹하고 자유분방한 동선과 그루브와 스타일에 절어있는 제스처, 일촉즉발의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무대 멘트에, 관중을 선동하고 열광시키는 방법을 몸으로 알고 있어요. MC가 군중을 움직이는 사람(Move The Crowd)이라고 한다면, JK 만큼MC 다운 MC는 없을 겁니다.


JK는 다이나믹 듀오와 함께, 후배 뮤지션들에게 길을 닦아 주려한 효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00년 후반 정글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팔로알토와 테비, 랍티미스트 같은 뮤지션을 영입했죠. 저 뮤지션들이 정글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요. JK는 서른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젊은 뮤지션들과 작업하며 절차탁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7집에서 더 콰이엇의 비트를 대거 발탁하며 음반을 꾸렸는데, 콰이엇이 언더 신을 넘어선 입지를 확보하는 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물론 콰이엇의 비트 역시 이전까지 다소 무질서한 느낌이 들던 JK의 음반에 정돈된 체계를 부여하는 구조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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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JK가 <쇼미더머니>6 출연을 확정 지었다는 뉴스가 도착했습니다. 드렁큰 타이거의 마지막 앨범, 9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고요. 이런 소식에 기대감을 표하는 분들이 많지만, 다소 냉담한 반응도 있는 것 같습니다. "JK  네가 뭔데 후배들한테 랩을 그만두라 마라 하냐." "9집 나온다는데 큰 기대는 안 되는군요." 이런 반응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오래된 영웅이 귀환한다는 소식은 나름의 감회를 일으켰습니다.


저는 힙합을 이루는 정체성 중 '리스펙'(Respect)을 불러오고 싶습니다. 미국 힙합의 개척자, 혹은 선구자들 DJ 쿨 허크와 아프리카 밤바타, 런 디엠씨,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라킴 같은 인물은 지금도 종종 거론되고 '레전드'란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현역 MC들은 그들에게 꾸준히 리스펙을 바치고 있고요. 저는 JK도 이런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 없는 뮤지션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힙합의 역사에서 드렁큰 타이거를 빼면 찢겨나가는 페이지가 꽤 있을 겁니다. 지금껏 많은 무대를 겪었고 많은 래퍼들을 보았고 씬의 역사 속에 이룬 것이 있는데, 씬의 현재를 향해 몇 마디 충고할 자격은 충분하죠. 오히려 저는 올드 MC들이 더 목소리를 내서 한국 힙합의 연결고리를 드러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지금 씬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확인하고 원점과의 거리를 잴 수 있을 테니까요.


힙합 커뮤니티에서 '퇴물'이란 표현이 흥하는 걸 자주 봅니다. "누구누구 퇴물이다 ㅇㅈ?", "퇴물 래퍼 한 번 꼽아봅시다." 이런 표현엔 오래된 것, 빛바랜 것에 대한 비웃음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랩 잘하는 래퍼들 정말 많고, 돈 잘 버는 래퍼도 많죠. 그들은 한국 힙합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JK 같은 선구자들이 맨땅을 닦아온 역사 위에서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건 아닐까요. 1세대 언더 뮤지션들이 언더 힙합의 성지 마스터플랜에서 그래도 힙합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했다면, JK 같은 1세대 오버 뮤지션은 온갖 크고 작은 행사장에서 힙합에 힙 자도 못 들어 본 사람들을 상대하며 활동했습니다.


한국 힙합의 양적 번영을 이룬 제일 변수는 <쇼미더머니>입니다. 하지만 <쇼미더머니>가 브라운관에서 웅장한 무대를 마련하기 앞서, 꾸준히 힙합을 퍼트린 이들의 몫도 잊어선 안 되겠죠. 그만큼 불려놓은 게 있으니까 CJ가 눈독을 들여 상품성을 키운 것 아닐까요. <쇼미더머니>의 존재감과 그들이 부른 논란이 너무나 큰 나머지, <쇼미더머니>에 열광하는 측이든 비판하는 측이든, 부지불식간에 '<쇼미더머니> 이전'의 역사를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원썬과 비즈니즈, 피타입 같은 1세대 래퍼가 <쇼미더머니>에 참가자로 나와 후배 래퍼들 앞에서 채점을 받고 불구덩이로 빠지는 걸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든 이유입니다.


힙합은 장르를 넘어 문화이고 라이프스타일입니다. 미국 힙합의 개척자들이 존경받는 건 그들이 엄청난 명반을 남겼거나 아직도 스킬이 시퍼렇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 문화에서 일군 것들과 퍼트린 것들을 기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스킬과 장르적 측면으로만 오래된 뮤지션들을 가늠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내가 즐기고 영향을 얻는 이 문화의 요소들을 한국에 도래시킨 사람들인데, 그만한 존중을 바탕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힙합 대부 같은 묘한 말로 '가짜 레전드'가 범람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정말로 존중해야 할 레전드가 망각된다면 그것도 아쉽지요. JK 혼자 한국 힙합을 만들었단 거 아닙니다. JK 이전에도 선구자가 있었고 역사가 있었죠. 이현도, 김진표도 그중 하나이고요. 이십 년간의 역사에서 JK 한 명은 오히려 작은 존재겠죠. 그러니까 그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모여 역사를 이루었다는 뜻이죠.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1세대 뮤지션들을 고인 취급하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합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아직도 음악을 하고 있고, 자기 음악의 동시대적 경쟁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MC 메타와 셔니슬로우 같은 인물은 여전히 출중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죠. 피타입은 ‘1세대’란 말을 지극히 꺼리는 것 같던데, 아마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반대로 말하면, 1세대라고 다 존경받을 행보를 걸어온 것도 아니겠죠. 어쩌면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비약을 감행해서라도, 리스펙이란 낱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힙합이란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준 안내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오래된 뮤지션이건 신예 뮤지션이건, 그들은 그 자체로 나와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존재입니다. 20년의 시간이 흘러, 한국 힙합은 명실 공히 역사라고 부를만한 것을 지니게 됐습니다. 어제의 이름을 기록하고 불러보는 건 시간의 권위에 바치는 맹종이 아닙니다. 오늘 활동하는 래퍼들이 내일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사랑과 우정의 항로를 닦는 일이며 힙합이란 문화를 향해 바치는 존중입니다.


Respect. 이것이야 말로 디스와 스웨거로 롤렉스 탑을 쌓은 <쇼미더머니>의 시대에 가장 시급한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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