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중학교 재학 당시, 교실이 아닌 학생지도부로 등교했다. 당연히 내 책상도 교실이 아닌 학생부 앞 복도에 놓여있었다. 아홉 명의 빡빡머리 친구들과 함께 줄지어 앉아있었다.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학생지도부로 들어가 뺨을 맞고, 반성문과 사안경위서를 쓰고, 다시 뺨을 맞은 뒤에야 복도로 나와 친구와 자리를 교대할 수 있었다.
미성년자의 잘못에는 부모의 책임이 있기에, 우리를 대신해 부모님들이 잘못을 빌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학교로 오셨을 때, 나는 엄마, 그리고 잦은 출장으로 바빴던 아버지 대신 삼촌이 왔다. 부모가 아닌 삼촌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엄마는 자기 자식만큼은 바른 길을 가길 바랐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듯 말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한참동안 삼촌은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내겐 애써 웃어 보였다. 엄마를 먼저 집으로 올려 보낸 후, 삼촌이 내 머리를 콕 쥐어박더니 물었다. “담배 있냐?”라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레종 한 갑을 꺼내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그리고 그와 같이 담배를 피웠다.
사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죄송하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죄송하지 않았다. 죽도록 쳐 맞고, 또 맞았는데 가족까지 호출해 무릎을 꿇게 한 선생만을 증오했을 뿐이다.
졸업식 날. 찢긴 교복을 손에 들고 속옷만을 입고 활보하는 나를, 그리고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쓴 나를, 꽉 안아준 사람도 그였다. 빛바랜 그의 정장은 그새 물 들었다. 그러나 그의 깨끗한 웃음 때문인지 더러워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도 엄마와 삼촌이 불려왔다. 만화 <더 파이팅> 속 ‘뎀프시 롤’을 따라하다가 짝꿍의 눈이 찢어졌다. 그저 '장난'에 불과했던 나의 행동은 어느새 '폭력'으로 변해있었다. 찬란했던 과거사 덕에 이미 난 ‘폭력을 일삼는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아무런 죄 없는 삼촌은 언제나 아버지를 대신해, 가해자의 편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그때부터, 친누나를 위로하고 조카에게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는 그를 ‘제2의 형이자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매일 함께 하지 않지만, 한 번의 통화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나아갈 방향을 얻곤 했다.
하지만 나의 군 입대와 동시에 그는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어설픈 애정만으로 그를 따른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을 때, 마주한 그는 걷지 못했다. “어디를 가던 기죽지마. 꼴통아” 간이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내게 말했다.
정확히 한 달 후. 그는 떠났다.
누군가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진 첫 경험이다. 가해자의 가족이 되어준 그에게 “죄송했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내 사과를 받아줄 그가 없었다. 영정 사진 속 환히 웃고 있는 그에게는 차마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땐, 무척이나 괴로웠다. 차라리 그가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나를 대신해 사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그 날 이후로 잘했건, 잘못했건 '죄송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스스로 그토록 무겁던 '죄송함'의 가치를 내려놓았다. 칭찬을 받아도 죄송했고, 실수를 했어도 똑같이 죄송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일상에서도.
여전히 어린 나의, 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어설픈 애정은 그가 떠나고 나서야 빛을 발한다. 사진첩 속, 화질이 낮아 깨진 사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환히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