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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Jan 23. 2022

우울증은 역병(疫病)이다

나의 우울증의 시작

글을 본격적으로 써보자고 다짐한 이후 이런저런 주제와 소재들을 생각해보지만 역시 가장 먼저 풀어내고 싶은 것은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다. 우울증을 깊게 앓던 시기의 상황과 그 당시에 썼던 일기,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 등의 이야기를 꾸준히 풀어나가 보고 싶다. 2022년의 시작인 지금은 내 인생 첫 번째 우울증의 끝자락에 와있다고 생각하는데 약물 용량을 서서히 줄여가는 것과 맞추어 글로 풀어내 가다 보면 인생의 한 챕터를 잘 마무리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절대 인생의 한 번이라고 장담할 수 없을 이 경험에 대해 기록해 두면 다음번이 찾아왔을 때 위안과 참고가 될 것 같다.


나의 우울증은 전염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의 우울증은 코로나와 같은 역병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로 사람들이 역병(疫病)이라는 단어와 함께 하루 종일 뉴스에서 나오는 '역학조사'라는 단어를 익히며 '역학(疫學)'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역병과 역학은 한자로 전염병 '역'자(疫)를 쓴다. 역병(疫病)의 가장 간단한 정의를 검색해보면 '전염력을 가진 유행성 질병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며, 역학(疫學)은 '특정 인구집단에서의 건강에 관련된 사건, 상태, 과정의 발생과 분포,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결정요인들을 다루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코로나 이전의 역학(疫學)은 동음이의어인 물리학의 한 종류인 역학(力學)과 점술을 탐구하는 역학(易學)에 비해 가장 덜 알려진 학문 분야였을텐데 이제는 그 유명세로 물리학의 역학 정도는 이기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석사논문 주제 또한 역학의 한 종류인 '약물역학' 연구였다. 역학 중에서도 약물로 인한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의 발생과 빈도, 원인 등을 규명하는 학문인데 학부 때부터 예방 약학에서 배워 본 기억이 있는 학문이지만 그때는 와닿지도 않았고 상당히 재미없어했던 기억이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C0를 재수강해서 C-를 받는 기염을 토해서 주변 친구들 사이에 꽤나 유명했었다. 역학은 최근에 의료 관련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이 발전하게 되었고, 학계는 물론 공공의료, 산업계 등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학 중에서 내가 상당히 재미있어했던 분야는 '사회역학'이다. 말 그대로 이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아프게 하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려대학교 보건대학원의 김승섭 교수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을 읽고 사람들의 아픔이 본인의 유전자나 생활습관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어찌나 위안을 받았는지, 적어도 열 권은 사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우울증은 전 애인에게서 전염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 우울증이 전 애인의 잘못인 것처럼 잘못 읽힐 수 있으나,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학습하였듯이 이것은 전파자의 잘못이 아니다. 역병은 내 면역력이 낮으면 어디서든지 감염될 수 있다. 전 애인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아서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공황발작을 경험했고 옆에서 지켜보았을 때 우울증도 동시에 앓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첫 공황발작을 경험했는데 이때가 나의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 시점이었다. 그는 출근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갓길에 겨우 차를 대거나 나와 함께 뮤지컬을 보다가 인터미션 시간에 뛰쳐나가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증상을 처음 얘기한 것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내한 뮤지컬을 보러 갔던 세종문화회관에서였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의 시대를 다시 들을 생각에 설렜던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런데 나는 대성당의 시대를 앵콜로는 듣지 못했다. 애인은 인터미션 시간에 밖에 나가서 어둡고 막힌 공간에서 숨을 쉬기 힘들다고 얘기했고 우리는 2부는 보지 않기로 했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모든 직원들이 목매달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피크 세일즈가 1,000억이 넘는 매우 드문 블록버스터 제품이었고 이 제품을 제대로 판매할 수 있기만을 기대하는 사장님과 마케팅 그리고 수십 명의 영업사원들의 압박에 나의 이마엔 늘 여덟 팔자가 새겨져 있었고 어깨는 굽었으며 위산은 매일매일 존재감을 뿜뿜하여 결국 나의 위장은 파업하기에 이른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남자 친구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그는 주 6일 근무하는 일을 했었는데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에 누워있기만 했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집에 찾아오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상담치료를 받기엔 상담 선생님들이 일하는 시간에 그는 시간을 뺄 수 없었고, 약물 치료는 거부했다. 나는 나대로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로 괴로웠으나 공황발작을 지켜보면서 내가 그나마 나은 상황이라고, 내가 애인을 돌봐줘야 한다고 다짐했다. 결국 갑작스러운 발작에 지친 애인이 약물치료를 시작했고 한 달 뒤에 약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 비해 꽤 빠른 진척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인이 의사였음에도 정신과 약물을 먹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했고, 공황장애의 증세가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되자마자 약을 끊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증상은 시작되었다. 나는 나대로 애인이 약을 먹지 않을 때는 약을 먹자고 설득, 애원, 협박을 하느라 에너지를 써야 했고, 약을 먹고 호전되면 우리 관계도 이제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희망을 가지곤 했다. 그러다 그가 약을 끊고 증상이 시작되면 희망은 다시 나의 기분도 추락했고 공감 요정인 나의 기분은 그의 상태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끝도 없는 롤러코스터였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담당했던 블록버스터 제품의 론치 협상은 결렬되었다. 어찌어찌하여 재협상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추가로 생겨서 다행이었지만 나는 그 한 달 동안 체한 상태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협상 막판엔 막상 할 일은 많지 않다. 그저 애를 쓰는 마음 때문에 에너지 소비만 심할 뿐이다. 애쓰는 마음 하나로 살이 쪽쪽 빠져갔다. 마지막 협상 날의 며칠 전 일주일간 연락이 없던 그가 나를 찾아왔다. 자신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한 달간 체한 것도 알지 못했고, 이틀 뒤에 협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도 영원히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에게 내 힘든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왜 하필 오늘이냐, 며칠만 참았다 얘기하지라며 그의 차 안에서 얼마간 울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이별과 함께 그의 공황은 나의 우울이 되었다. 이것이 나의 우울증의 시작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세요 (출처:트위터 스누피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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