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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Jan 25. 2022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상담치료의 시작

한 달 동안 나의 위장은 파업 중이었고, 지나가던 사람이 뱉은 말 한마디에 눈물 버튼이 마우스 왼쪽 버튼처럼 쉽게 눌려버리던 나날들이었다. 전 애인과 헤어지기 며칠 전, 애인은 연락두절이었고, 맡은 프로젝트의 앞날은 깜깜했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심리 상담을 예약했다.


다행히 심리 상담에 대한 거부감은 낮은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봤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이십 대 후반에 마음이 틀어져 삼 년간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때가 있었는데,  삼 년간의 단절 이후 만난 친구가 전과 달리 매우 안정된 마음 상태를 보여줘서 어떻게 이렇게 변했냐고 물어봤더니 친구는 몇 년간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친구는 기본적으로 극강의 외향성과 함께 기분의 고저가 매우 다이내믹한 사람이었고, 나는 중학생부터 극 내향형으로 방에 처박혀서 인디음악과 라디오만 끼고 사는 홍대 병 말기 인간으로 우리 둘은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둘 다 사회생활을 거치며 많이 사회화되었지만, 워낙 감정 기복이 심한 친구였고 초등학생 때부터 나에게 늘 그 감정 기복을 보여주었었기에 오랜만에 본 친구의 변화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무튼 그 시절 나의 상태를 지켜보던 친구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자신의 상담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바로 예약을 하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첫 상담 날에도 회사에 붙잡혀 한 참 동안 상사의 하소연을 듣다가 출발시간이 한참 늦어져버렸다. 퇴근시간 강남의 교통체증에 조급해하며 몇 번을 전화를 걸어 10분, 20분씩 늦어진다는 전화를 걸어가며 운전을 하다가 결국 한 시간이나 늦게 상담실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한 시간이나 늦게 오고 있는데도 차분하고 친절하게 안심시켜주는 말들과 잘 왔다며 반갑게 맞아주시는 모습에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상담치료는 우선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설명하는 걸로 시작한다. 상담을 처음 가는 주변 친구들에게 항상 호언장담하는 것은 상담 첫날 상담 선생님을 앞에 두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것이라는 것이다. 힘든 얘기를 쏟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져서 찾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의 얘기를 시작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야기를 하면서 상담 선생님들의 필수품은 클리넥스이겠구나 생각했었다.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처음 울면서 했던 말이고, 삼 년간 상담을 받은 지금은 상담 선생님이 가끔 나를 놀리며 추억하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 본 경험이 없었다. 엄마가 배우라고 해서 피아노와 플루트를 배웠고, 서예, 발레, 미술, 바둑을 배웠다. 애매한 재능은 저주라고 했던가. 모든 것을 애매하게 잘했다. 피아노도 플루트도 발레도 다 애매하게 잘했다. 한쪽만 파기엔 재능이 다 너무 애매해서 결국엔 공부를 했다. 지금도 나는 공부는 결국에 본인이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학원과 과외로 시간낭비가 너무 많았던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했던 엄마는 팔 학군의 애매한 언저리에서 애매한 정보를 쫓아 나를 유명하다는 대치동 학원들에 보냈다. 원해서 다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고 억지로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대학도 엄마가 나 몰래 넣은 원서가 덜컥 붙어서 가고 싶지 않았던 학교에 억지로 끌려갔다. 전공 공부도 너무 재미없어서 교양과목과 타과 전공 수업만 기다렸고, 하필 과내 동아리만 가입하는 분위기의 과라 인디밴드들만 쫓아다니던 홍대 병 말기 환자가 마음에도 없던 과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했다. 시키면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라 선배들이 시키는 동아리 활동은 참 열심히도 했고, 전공 공부는 아무도 시키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학생활에서 학점 대신 오보에 하나는 남겼다.


칼 졸업을 하고 그나마 흥미를 느꼈던 분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 건 다행이었다. 공부보다 일이 더 쉬웠다. 눈치가 빨라서 남들이 뭘 원하는지 빨리 캐치했고, 남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일도 깔끔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일도 누가 시키는 것이니 열심히 했고 사람들한테 폐 안 끼치고 잘 지내다 보니 두루두루 평가도 잘 받았고 승진도 빨랐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프로젝트도 맡아서 해보고 팀원들도 생겼지만 프로젝트의 성공 목전 앞에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저 프로젝트의 협상이 성공해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저 프로젝트하려고 살아온 것은 아닌데? 내가 하고 싶어서 맡아서 한 게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한 건데? 늘 원하지 않은 공부를, 원하지 않은 일을 한다는 억울함이 있었다.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서 만난 사람은 고작 한 명이었다. 대부분 누가 먼저 고백하면 만나다 좋아지는 식이었다. 전 애인도 왜 좋냐는 상담 선생님의 물음에 말이 막혔다. 기껏 생각해낸 몇 가지의 이유 중에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대답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삶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인생은 늘 나에게 힘든 것, 고달픈 것, 가끔 즐거운 것이었다. 서른두 살에 외국계 회사의 팀장이 되었지만 내 안에는 우울만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첫 상담 이후 지금까지 거의 3년간의 시간 동안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초반 1년 반 정도는 거의 매주 상담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격주로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비로 쓴 돈은 대강 계산해도 천만 원이 넘는다. 삼 년의 시간 동안 천만 원을 들여 배운 것을 한 줄 요약하자면 결국 '내가 나로 사는 방법'이다. 서른이 넘어서 내가 나로 살기 위해 부모님과 징그럽게 싸워댔다. 배신이라며 화내는 엄마에게 울며 싸워가며 억지로 독립을 하고, 남들이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만류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해외로 일하러 나가고, 나를 이해받기 위해 우울증 진단 결과를 부모님 눈앞에 들이밀었다.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겨우 나를 가장 최우선에 둔 삶을 살고 있다. 나를 돌보기 위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휴식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가끔 늦잠을 잔 날 나를 자책하곤 하지만, 넘쳐 나는 시간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들을 천천히 시작해보곤 한다.


이 주 이상의 우울한 기분이 지속될 경우 우울증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우울증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크게 유전적, 환경적, 성격적 요인이 있다. 나의 경우는 성격적 원인이 강하여 상담치료를 진행하여 1년 정도의 치료에서 효과를 보다가 환경이 극단적으로 안좋아지자, 상태가 다시 안 좋아져서 약물치료도 병행하고 있다. 약물 치료는 즉각적인 기분 완화에 탁월하지만, 나와 같이 성격 자체에 우울증의 원인이 있는 경우라면 약물치료만 진행할 경우 환경이 안 좋아지면 다시 증세가 악화되어 완치가 어렵기 때문에 상담치료를 함께 권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 나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면 환경에 가끔 흔들려도 다시 중심을 잡아나갈 수 있다. 내가 백신을 맞고,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면역력이 강하면 역병도 가볍게 넘길 수 있듯이. 오늘도 줌으로 상담을 받다가 상담 선생님에게 내게 지난 삼 년은 다시 하라면 못하겠지만, 지나고 나니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시기이고, 지금이라도 겪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고 선생님이 헨리 나우웬이라는 심리학자가 '우울증은 축복이다'라고 얘기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축복이라 부르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지마는 치료가 완료되고 난 미래에는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다.


상담에서 추천 받았던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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