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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Jan 30. 2022

우울과 엄마에 대한 분노

심리상담 치료 초반부 이야기

2019년 3월부터 약 삼 년간 꾸준히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초반 1년 반 정도는 매주 한 번씩 꾸준히 받다가 그 이후는 이주에 한 번씩으로 간격이 늘었고, 지금은 상태가 많이 나아지기도 했고, 수입도 없는 상황이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받고 있다. 친한 친구의 널뛰는 감정이 심리 상담을 통해 많이 안정된 것을 보고 추천을 받아 찾아갔고, 다행히 현재까지 상담 선생님과 잘 맞는 편이라서 운이 좋았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주변에 상담치료를 시도하였다가 상담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아서 중단하거나, 선생님과 성향이 잘 맞지 않아서 심리 상담 자체에 실망하고 포기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나 또한 약을 처방받으러 다니는 정신과의 경우에는 정신과 약물 영업사원을 오랫동안 했던 지인에게 추천받은 우리나라의 빅 3 3차 종합병원의 정신과 과장을 오래 하신 저명한 분이 개원하신 곳을 다니는데, 기대와 달리 상담시간도 길지 않고 선생님 캐릭터상 공감받는 기분이 덜하여서 약물처방 이외의 치료에 대해서는 기대를 하지 않고 약 타는 용도로만 다니고 있다. 최근 2년간 홍콩에서 살았었는데 오히려 홍콩에서 다녔던 정신과의 경우 좀 더 세심하게 나의 상태를 나누고, 공감하여 주고,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으로 많은 옵션을 제시해 주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우울증 재진환자의 경우 한국의 정신과 클리닉에서는 3-5분 정도 진료시간을 쓰는데 비해 홍콩에서는 30분(초진은 1시간)을 꽉 채워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홍콩의 치료비가 열 배 정도 비싸긴 하다. 두 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의료 시스템 전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잘 맞는 상담 선생님이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의 경우 심리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약물치료에 도움을 받는 의사 선생님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만약 심리상담사와 정신과 전문의 중 한 명의 치료만 받고 있다면 나에게 맞는 선생님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심리 상담이나 병원에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에너지와 용기를 낸 것인데, 이 것을 두세 번 시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힘을 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첫 술에 실망하지 않고 맞는 사람을 찾아 몇 번 더 시도해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처음 나간 소개팅에서 연인을 찾을 수 없듯이, 나에게 맞는 선생님을 찾는 과정도 인내가 필요하다(세상에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정말!).


이야기가 좀 샜는데, 심리 상담 첫날에 내가 찾아가게 된 이야기를 죽 털어놓고 난 후에는 선생님이 집안의 가계도를 그리기 위한 질문을 하신다. 외가 친가 양쪽의 조부모님부터 엄마 아빠의 형제자매들, 나의 형제자매까지 생존 여부, 성격, 정신과 질환의 가족력, 가족관계, 어떤 일을 하는지 등에 대해 물어본다. 자세한 호구조사가 끝나고 나면 이제 성장과정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부터 성장과정에서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게 된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게 되며 나의 병의 원인도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찾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별의 감정의 5단계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고 했던가. 상담 중 나의 엄마에 대한 감정은 우울-분노-이해-연민-수용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1단계: 우울


우울 단계는 엄마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상담치료를 시작하게 된 시기의 우울감에 대한 것이다. 나의 경우 심리 상담 치료를 몇 개월간 받고 약간의 호전이 있었는데, 1년 후 홀로 처음 해외생활을 하고 코로나로 좁은 집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과도한 업무량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외부적 스트레스 요인이 작용해 정신과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약물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약물치료 없이 심리상담 치료만 받던 경증 시기와 약물치료를 동반한 중등도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그중에 약물치료가 없었던 시기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약물치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써 볼 생각이다.


우울증 초기 당시 내가 상담을 받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였던 이유는 우울이 너무 익숙한 감정이었고, 현재 자살사고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이 존재하는 십 대 시절부터 기본적으로 우울감을 깔고 살고 있었는데, 늘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우울하지만 가끔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십 대 시절을 생각하면 방구석에서 혼자 유희열이나 신해철의 라디오를 들으며 수학 문제를 푸는 장면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동년배들에게 공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늘 5-10년 윗 세대의 문화를 선망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울이란 나의 아이덴티티 같은 거라서 큰 문제라고 느끼지 않고 20대까지의 삶을 살아왔었다. 그러다 30대가 되면서 직업적 책임감이 커지고 안 그래도 책임감이 강한 편인 나는 남들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동시에 관계에 있어서도 주로 참고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 편이라 여러 면에서 분출되지 못한 스트레스가 독처럼 몸에 퍼져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급식만 먹으면 자주 체해서 베아제를 일주일에 3-4번은 먹을 정도로 위장이 약했는데, 우울증 초기에는 한 달 동안 체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얼굴에 화농성 여드름이 올라오고 생리가 끊기는데, 피부는 말할 것도 없고 생리는 당연스레 몇 달간 끊겨 있었다. 겨우겨우 일어나서 회사를 갔고, 다녀와서는 주로 누워만 있으면서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내가 우울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우울감이 심한 정도겠거니 하며 정신과 진료보다 심리 상담을 선택했다.



2단계: 분노

상담의 과정은 현 상태의 불편함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나에 대해서 탐색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의 과거를 계속 돌아보는 과정을 갖는다. 나의 경우 30대 초반의 미혼인 상태에서 상담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아기와 학창 시절, 사회생활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생활했던 가족 특히 부모님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상담을 경험한 나의 많은 여성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엄마에 대한 분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에는 엄마가 나의 삶을 과도하게 컨트롤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엄마를 향한 분노가 강화되었다. 그동안에는 엄마의 과도한 간섭이나 잔소리에 사건별로 싸우면서 화가 났었다면, 이제는 내 인생 전반에 걸친 영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화가 나기 사작하는 것이다. 이 분노의 단계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돌아보면 약 일 년 반 정도 지속되었다.


나의 엄마는 누구보다 성실한 여성이다. 엄마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누구보다 고군분투했다. 재주도 많고 똑똑해서 일과 육아 외에도 취미생활로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거실 벽에 걸려있던 엄마가 그린 정물 유화나 내 방을 장식하고 있던 엄마가 만든 지점토로 만든 각종 악기를 불고 있는 인형들을 회상해보면 그건 일반인이 아닌 예술가의 작품이었다. 엄마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도 제법 잘 쳤고, 늘 일본어나 영어, 프랑스어를 배우러 다니거나 독학하곤 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와서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박사학위까지의 과정에 대한 무게감을 회상해보면 사뭇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늘 엄마는 긴 운전을 하며 강의를 다니거나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국을 끓이고 밥을 하고 나와 동생의 교육에 대해 주변 친구 엄마들과 논의했으며, 가끔 나와 친구의 영어 과외를 해주었고, 학원 픽업도 해주었다.


그렇게 가진 재주를 활용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은 욕심도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정해준 답이 있었다. 엄마는 인문학 전공을 해서 들인 노력에 비해 경제적인 보상이 낮다는 결핍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동생에겐  이과의 전문직을 강요했다. 동생은 중학교 1학년  시험부터 전체에서  문제만 틀리며 전교 1등으로 화려한 학창 시절을 시작했다( 문제는 답이 헷갈려서 OMR 카드에 칠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동생의 성격을 드러내는  면이다). 반면 나는 엄마가 이해할  없는 한창 모자란 성취도였는데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는  인생 가장  본시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교 31등이었다. 엄마는  나의 성적을 탐탁지 않아했고, 이런저런 학원들에 보내고 수학 과외 선생님을 붙였다. 수학 과외 숙제가  너무 많아서 밤에 숙제를 해야 해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고, 라디오를 듣다가 집중하지 못해서  답을 베껴갔다. 그렇게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1 때까지는 꾸준히 성적도 오르고 괜찮았다.   공부를  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니 2 중반 때부터 성적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고 재수를 했다. 돌아보면 재수 생활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엄마는 내가 죽을 만큼 힘들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걸 역으로 이용하곤 했다. 유행했던 폴로  모자를 사달라는 핑계로 얼굴을 가리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재수하는  너무 부끄러울 것이라고 짐작하며 흔쾌히 사주었다. 결국 동생과 나는 같은 해에 대학을 갔는데, 엄마는 건축과에 가고 싶은 동생을 의대에 집어넣었고, 나는 나름 수능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불안해서 몰래  언수외만 보는 수시전형에 나도 모르게 붙어서 원치않던 학교의 약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엄마는 성공한 것이다.


우리 자매는 둘 다 표면적으로는 멀쩡했으나 속에서는 적응하지 못했다. 동생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는 억울함에 6년 내내 자퇴라는 협박 카드를 들고 엄마를 대했고 엄마는 혹시 나라도 동생이 자퇴를 할까 전전긍긍했다. 나는 대강 4년만 어떻게 버텨보자는 생각에 전공 공부는 내팽개치고 교양과 남의 전공만 기웃거리며 지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제 나의 연애를 탐탁지 않아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나의 연애 이야기는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언뜻 얘기할 때마다 엄마는 애인의 고향, 학교, 전공, 직업을 트집 잡으며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자연히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더 많아졌다. 방에서 애인과 전화를 하고 있으면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동생에게 내 연애에 대해 질문을 했다. 집안일에서도 딸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고 일 년에 7번의 제사를 지내는 아들 없는 종갓집의 장녀로서 중학교 때부터 나는 각종 제사 음식 준비에 불려 다녔다. 대학교 때 전 부치는 게 너무너무 지긋해서 설 전날 친구들과 놀다 들어갔더니, 엄마는 작은 아빠와 엄마 앞에서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머리가 커가며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항상 막판에는 어디 엄마한테 싸가지없이 바락바락 말대답을 하냐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감정 표출로 늘 나를 이겼다. 엄마는 늘 작은 것들에도 답을 정해 놓았고, 취향의 문제에도 답을 정해 놓고 강요했다. 나의 석사 논문을 건네주었을 때에도 분야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 논문의 제목에 대해 틀렸다고 지적했다.


동생이 준비하던 결혼이 어그러졌을 때 엄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파혼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고, 동생보다 자기가 더 힘들어하며 뒷수습을 미뤘다. 결국 내가 전면에 나서야 했고, 동생 전 애인과 싸우는 것은 동생도 아빠도 엄마도 아닌 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새 애인과 결혼을 선포했고, 동시에 동생은 나에게 독립을 권했다. 그동안은 같은 엄마를 둔 둘이 동병상련하며 풀었지만 이제 언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었던 터라 동생 결혼에 맞추어 나도 독립 준비를 진행했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엄마에게 독립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배신이라고 화를 냈고, 몇 주동안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이사 가기로 한 집을 보여줬을 때에도 엄마는 화장실 변기 실리콘의 곰팡이에 대한 지적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늘 엄마는 인생의 크고 작은 순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나의 인생을 대신 쥐고 흔들었고, 내가 원하지만 본인의 뜻에 반하는 선택을 할 경우 나를 비난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지 못했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만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독립이라는 내가 원하는 카드를 꺼내 보였을 때, 경제적으로 독립이 된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는 딸에게 죄책감을 주는 방식으로 맞대응을 했다. 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과 일상적인 순간들에서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한 단면으로 부딪혀 괴로웠던 것이 상담을 통해 인생의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며 엄마가 나를 키운 방식에 대해 극심한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 인생을 이렇게 우울하게 만들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삼십 년을 불행하게 낭비해버렸다는 생각에 화가 가득 차서 일기에는 엄마에 대한 욕이 가득했고, 부모님 집을 향하는 발걸음도 뜸해졌다.


많은 나의 여성 친구들이 나와 같이 엄마에게 분노를 갖는 시기를 거치는 것을 본다. 딸의 학업이나 직업적 성취, 원하는 외모에 대한 강요, 엄마의 감정 받이, 엄마의 기준에 부합하는 남자와의 연애 또는 결혼 등 분야만 다를 뿐 많은 딸들은 엄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그 고통의 원인인 엄마에게 분노하고, 엄마를 미워하는 자신을 보며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이 분노의 단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힘에 대해 느끼곤 했는데 나는 내 변화하는 생각들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가까운 친구들 한 두 명과 나의 감정 상태나 심리상담의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다. 또한 아주 가깝진 않더라도 주변인들에게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상황과 생각을 접하게 되고 내 상황에도 적용해 보면서 공감과 안정을 찾곤 했다.


특히 가까운 친구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보다 먼저 이 분노의 시기를 거친 친구들을 통해 분노의 시기 후에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고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경우 분노의 시기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이 되어서 엄마를 다시 받아들이는 시기가 올까라는 의심이 오래 들긴 했지만, 결국 그 이해의 시기가 오기는 왔다. 다만 그 과정까지 또 여러 번의 엄마와의 적극적인 부딪힘이 필요했다.


이어서 다음 글에.. :)


친구와 나누기 힘들다면 책으로 간접적인 공감을 얻어보는 것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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