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와 술의 상관관계
"내일 내추럴 와인바 갈 건데 같이 갈래?"
친구의 카톡이었다.
"놀랍게도.. 금주중이야"
"몇 시간 짼데? 6시간?ㅋ"
"무려 15일"
"말도 안 돼.. 술꾼이 어쩐 일이야?"
"나 요즘 술 말고 차마 셔"
처음으로 와인 마시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 동안 환장을 하고 와인을 마셔댔다. 와인 자격증인 WSET까지 땄으니 할 말 다했다. 할아버지, 아빠가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고 아빠는 술이 세기도 하고 자제해서 마시는 편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술에 대한 거부감이나 무서움이 전혀 없었고, 자연스레 스무 살 이후부터 술을 즐겨 마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의 아이덴티티에 술이 포함되었음을 지인들의 새로운 사람에게 하는 내 소개를 통해 깨달았다.
얘는 참 술 좋아해
대학 때는 소주(애주가는 단 술은 먹을 수 없다며, 과일소주는 입에 대지 않았다), 수제 맥주가 유행할 때에는 에일맥주, 서울에 스피크이지 바가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한 시절엔 피트 한 위스키들을 마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에서 하루키가 위스키의 끝엔 아드벡이 있다고 했던가. 아드벡 찍고, 라프로익 트리플 우드가 나의 최애 술로 자리 잡았다. 라가불린도 좋았지만 매번 즐기기엔 살짝 비싸서 면세점에서 파는 라프로익 트리플 우드가 딱이었다. 과하지 않게 피트 했고 적당히 흔하지 않았다. 퇴근 후 베이스가 좋은 스피커로 궁궁거리는 음악을 틀고, 집에서 위스키 한잔씩 홀짝거리며 창문 밖에 반짝이는 유리창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적당히 살만한 삶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위스키를 즐기던 3 년 전, 해외이주를 할 일이 생겼다. 홍콩에서 일하게 되어 혈혈단신 홍콩으로 이주했다. 홍콩으로 향하기 전 가장 기대했던 건 당연히 주세가 없는 곳에서의 음주생활이었다. 홍콩으로 향하기 전부터 구글 지도에 센트럴, 셩완의 유명한 바들에 초록색 깃발을 꽂으며 모두 다 가보리라 다짐했다. 홍콩에서 구한 집에 대강의 살림살이를 장만하자마자 리쿼 스토어를 찾았다. 생각보다 위스키가 비쌌다. 역시 위스키는 면세점이 최선인가. 그러다 우연히 맞은 편 장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 가격표를 보고 귓가에 종이 울렸다.
여기.. 와인이 많이 싸네?
오래지 않아 홍콩이 아시아의 와인 성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 바로 인터넷으로 홍콩의 와인 소매 사이트들을 찾아보았고, 한국의 반값 이하의 가격과 수많은 종류에 눈이 돌아갔다. 심지어 이곳은 와인을 택배 배송으로 받아 볼 수 있는 곳이었다(참고로, 우리나라는 전통주만 택배 배송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슬슬 소개되고 있던 내추럴 와인도 훨씬 많은 종류가 판매되고 있었다. 바로 배송비 무료 금액인 1,000 HKD를 살짝 넘겨 장바구니에 담았다. 비비노에서 열심히 찾아보고 평점 4.0 이상의 와인들로 골랐는데 무려 다섯 병을 담을 수 이었다. 내추럴 와인 다섯 병이 십오만 원이라고?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바로 8평짜리 좁은 집에 굳이 굳이 와인장을 들였다. 이케아에서 배달 온 와인장을 조립해주면서 친구가 도대체 이 좁은 집에 와인장을 왜 두어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에겐 가장 갖고 싶었던 소중한 가구였다.
다양한 종류를 마셔보고 싶어서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와인을 여섯 병씩 깔아놓고 친구들 여섯 명을 불렀다.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건 살구향이 나네? 이건 forest, 이건 earthy.. 모르면 용감하다고 술에 취해 와인 좀 마셔본 척 서로의 깔롱과 주접을 받아주며, 그렇게 즐거운 와인 생활을 시작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된 즈음이라 정부 규제로 외부에서 만날 수 없게 되어서, 우리 집에서의 와인 모임은 정기모임으로 발전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모두들 당연한 듯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매주 초 신나게 와인을 골라 배달시켰고, 토요일마다 우리는 낮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와인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모임 이름이 2PM이었다). 문제는 당시 내가 우울증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상담 선생님은 항우울제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술을 줄이라고 권고하셨지만 개버릇 누굴 줄까. 몇 달간의 약물치료로 우울이 조금 나아진 나는, 매주 토요일 친구들과 12시간씩 대화를 하며 집단 심리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러다 술이 술을 마시며 주량을 넘어서 마시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엔 토할 듯 토하지 못하는 메슥거리는 속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며 어제의 나를 타박했다. 나는 주로 숙취가 위장으로 오는데, 이십 대 중반엔 울렁거리는 속이 마법의 새벽 6시면 잠잠해졌다면, 이십 대 후반엔 마법의 시간이 오후 12시, 삼십대가 된 이후부터는 오후 여섯 시는 되어야 겨우 마법에 시간에 닿을 수 있다.
음주생활이 길어지면서 한 가지 증세가 더 추가되었다. Black out 이 잦아졌다. 어제 신나게 술 마시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처음 black out을 경험했던 날, 전 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조심스레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다행히 친구들은 이상행동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너 멀쩡했는데?
마음이 놓였다. 나 술 취해도 이상한 짓 안 하는구나? 이후 기억이 안나는 경우가 잦아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술 취해도 말이나 행동이 이상하지 않다니까 뭐. 이때까지만 해도 경각심이 없었다.
문제는 우울증 약과 함께 과도한 음주생활이 길어지면서 발생했다. 몸이 경고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경고는 꽉 끼는 레깅스를 입고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확인했다. 하이킹을 갔다가 집에서 와인을 마시는 스케줄이라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하필 작은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다음 날 샤워를 하고 비누칠을 하는데 허벅지 가득 피멍이 들어 있었다. 정말 허벅지 가득이었다. 술 취하면 사지에 크고 작은 멍들은 자주 들어보곤 했는데, 이렇게 넓은 면적의 피멍은 처음이었다. 허벅지를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기억도 없었다. 피멍이 들었는데 술 마신 다음 날이라 왠지 간수치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간이 망가졌구나. 친구들에게 허벅지 사진을 보내며 우루사 좀 구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친구는 술 좀 작작 마시라며 타박을 해가며 며칠 뒤 국제우편으로 우루사 한 병을 보내줬다.
정신과 선생님에게 허벅지의 멍 얘기를 하니 선생님이 드물지만 가능한 약물 이상반응이라며 혈소판 수치를 검사해보라고 했다. 간수치와 더불어. 제네럴 닥터를 찾아가 피검사를 받으며, 다시는 술을 안 마시겠다 약 50번 째로 다짐했다. 다행히 다음 날 확인한 혈소판과 간수치는 정상이었고, 그 주 토요일 나는 50번 째로 다시 자신과의 약속을 잊었다.
두 번째 경고는 조금 더 심각했다. 회사에서 만나 친해진 와인을 좋아하는 프랑스 친구가 Korean night을 제안했다. 침사추이의 맛있는 한식당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와인을 페어링 해서 마시자는 제안이었다. 프랑스 여성들과의 코리안 나잇이라니 우아한 밤을 상상하며 괜히 프랑스 브랜드의 하얀 실크 셔츠를 입고, 좋아하는 내추럴 와인샵에서 한식과 어울리는 와인 두 병을 추천받아 침사추이의 한식집 '압구정'으로 항했다. 이름은 압구정이지만, 신촌의 주점 같은 분위기의 곳이었다. 당연히 프랑스 여자 친구들이 올 것이라 상상한 것과 달리 나의 프랑스 친구는 훈훈하고 훤칠한 세 명의 프랑스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나와 친구들은 그날 신이 나버렸다. 각자 가져온 여섯 병의 와인 사이에 소주를 끼워넣기 시작했다. 한국의 술 문화를 전파한답시고 원샷을 외치며 연신 소주잔을 머리에 털었고, 소주병 뚜껑 꼬다리를 감아댔다. 결국 프랑스 친구들을 데리고 한국식 노래방까지 끌고 갔고, '소원을 말해봐'의 발재간 이후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 날 물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 내 방 침대 위였는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 같아 일어나 보니 내 두 다리가 빨간색이었다. 정말 다리가 전체가 온통 빨간색이었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얀색 이불 위에 놓인 내 빨간 두 다리가 대조되어 더욱 무서웠다. 정신없이 화장실로 향했는데 화장실에선 세면대에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눈을 돌리니 내 빨간 다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욕조 바닥에 빨간 토사물이 가득했다. 어제 마신 빨간 와인들과 프랑스 친구들이 찬양하며 영문 스펠링까지 알아간 빨간 육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곱게 입고 간 프랑스 브랜드의 하얀 실크 셔츠와 흰 린넨 반바지는 내 위장을 거친 와인들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실크 셔츠와 린넨 바지의 얼룩 지우는 방법을 찾아보고 손세탁을 하며 정말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친구는 소파 위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혈기왕성한 프랑스 친구들 사이에 고이 잠든 나를 우버를 태워, 우버 기사님에게 자기 번호를 찍어주며 집에 도착하면 제발 전화 한 통만 해달라며 확인을 받고 집에 보냈다고 했다. 친구 덕에 홍콩에도 있는지 모르겠을 장기팔이범에게 안 잡혀가고 살아 있구나 생각했다.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상품명 프로작, 렉사프로, 졸로프트 등으로 판매되는 우울증 치료제이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라는 이름 그대로 세로토닌이라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이 세포 내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 세포외에서의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 유지시켜주는 것이 이 약의 항우울 효과를 내는 기전이다. 반면 알코올의 경우 GABA(Gamma-Amino Butyric Acid)와 glutamate 수용체에 작용한다. 소량의 알코올의 경우 GABA 수용체를 통해 항불안 효과를 나타낸다. 기분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우울증 환자들의 알코올 의존도는 일반인에 비해 높다. 취중진담이 가능한 게 다 GABA 때문인 것이다. 또한, 알코올은 glutamate의 NMDA(N-methyl-D-aspartate) 수용체를 억제하여 기억력과 인지기능을 억제시킨다. 나의 black out 도 다 이 것이 원인인 것이다.
많은 문헌에서 SSRI와 알코올의 가능한 상호작용으로 우울과 불안의 악화, 인지 및 운동 능력의 둔화, 기억력 또는 성격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SSRI와 알코올의 동시 투약의 부작용으로 black out 위험의 증가, 어지러움과 진정작용, 인지 작용의 약화, 반응 시간의 둔화, 수면 방해, 알코올 중독 위험의 증가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코올이 SSRI의 부작용을 강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기나긴 음주생활로 black out 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기억력도 상당히 나빠졌음을 뼈저리게 체감한다. 나빠진 기억력은 주변인의 근황이나 함께한 추억 또한 잊게 만들어 그들의 서운함을 불러일으키고, 그때마다 나는 항상 미안한 마음 가득이다. 또한, 내가 투약하고 있는 Lexapro(escitalopram)의 FDA 라벨을 보면 abnormal bleeding(비정상적 출혈)이 경고 사항 일곱 번째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술 마신 다음 날 허벅지의 거대한 피멍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SSRI와 알코올의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은 pubmed 등을 열심히 뒤져봐도 정확히 밝혀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음주 경험과 짧은 문헌 검색들을 통해, 내 몸이 보낸 신호들은 모두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SSRI의 병용이 이유였으리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불어 나의 경우에는 금주를 하는 동안 기분부전이 가장 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금주를 15일째 이어가고 있고, 3개월째 혼술을 하고 있지 않는 지금, 저번 달까지만 해도 일주일씩 찾아오던 기분 부전을 경험하지 않고 있고, 불안이 덜하며, 새로운 것에 대한 의욕이 유지되고 있으며, 건강한 위와 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의 수많은 금주 선언 이력과 그 결과를 되돌아보았을 때 이번 금주 역시 모든 지인의 의심을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올 초 천만원을 걸고 시작한 침착맨의 금연선언과 같이 나의 이번의 금주 다짐만은 다르다고 믿고 싶다. 우울증의 후반부 시기로 느껴지는 지금, 나는 진심으로 이 우울증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싶기 때문에.
참고문헌.
음주와 뇌 건강: 기전과 개입, 민정아 등. J Korean Med Assoc 2010 December; 53(12): 1115-1123
Lexapro (escitalopram oxalate) FDA prescribing information
‘Hangxiety’: why alcohol gives you a hangover and anxiety, the guardian.com
The Dangers Of Mixing SSRIs And Alcohol, vertavahealt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