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아나 Mar 06. 2022

홍콩할매귀신에서 Sweet Home Kong 까지

나에게 홍콩이란

유난히 인연이 많은 장소가 있다. 좋든 싫든 이상하리 만큼 자꾸 엮이는 동네. 한국에서 잠실이 그렇다. 나는 잠실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태어난 이후 삼십여 년 이상을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만 살아왔다. 학창 시절을 보낸 학교들도 모두 다 잠실에 있었고, 친구들과 놀러 가는 곳은 주로 신천의 먹자골목이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스티커 사진을 남겼다.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 용기를 내어 기껏 잠실을 벗어나 봤자 코엑스, 강남역 타워레코드 정도였다. 짧은 대학생활 이후 테헤란로에 있는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높은 빌딩들 사이에서 이 사회의 경제 일꾼이 된 것 같은 뽕에 취해 나름 즐거운 이 년을 보낸 것도 잠시, 다니던 회사는 매출이 시원찮아지자 사무실을 삼성동에서 잠실로 이전하게 되었다. 직원 대부분이 난색을 표했지만, 나는 더욱더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 사무실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있는 지겨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24시간을 잠실에 머물러야 하다니.. 지겨와 지겨와를 외치며 역마살의 흔적조차 없어 보이는 내 삶에 답답해하던 어느 날, 친구가 추천해준 이대 앞의 용하다는 점집에 사주를 보러 갔었다. 신점은 처음이라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갔었는데, 점을 봐주신 할아버지 무당은 아무 정보도 흘리지 않았건만 내가 살아가면 좋을 터전으로 석촌호수를 집어내었다. 으악! 잠실은 홍콩할매귀신처럼 벗어날 수 없는 존재구나 싶었다.


재미로 찾아본 홍콩할매귀신 뉴스. 인터뷰하는 아이들이 쓰는 80년대 서울 사투리가 재밌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89/nwdesk/article/1823642_30389.html


홍콩 역시 나에겐 이상하리 만큼 인연이 닿는 도시였다. 시작은 아빠의 홍콩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빠는 왕가위 감독 영화의 광팬이었다. 아빠는 왕가위 영화에서 극대화되는 홍콩 특유의 분위기에 환상이 있었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시절 홍콩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벌써 20년쯤 전 일이라, 분명히 아빠는 설레는 얼굴로 중경삼림 속 양조위의 전 여자 친구 집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센트럴의 에스컬레이터나 임청하의 권총씬이 있었던 침사추이의 청킹맨션 건물을 데리고 갔을 텐데, 그 시절 그 장소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하나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홍콩 공기의 달콤함이다. 건물의 격자 모양의 무늬가 인상 깊은 센트럴의 Bank of China Tower 앞에서 높고 빽빽한 홍콩의 멋진 건물들을 돌아보며, 이상하게도 따뜻하면서 달큼한 향기가 공기 중에 배어 있는 것을 느꼈다. 달콤한 공기가 좋아서 숨을 내뱉기도 전에 공기를 들이마셔 숨이 차올랐고, 가슴이 부풀어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면 비 오는 날 아파트 복도 냄새를 좋아했던 나의 수상한 후각 취향으로 홍콩의 멋진 풍경에 취해 홍콩의 매연냄새를 긍정적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긴 한데 아무튼 그 강렬한 감각은 아빠에 이어 나까지도 홍콩에 대해 평균 이상의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


달콤한 향기로 기억되는 Bank of China Tower


홍콩은 그 이후에도 아슬아슬 이어졌다 어긋났다 하며 내 인생에 어른거렸다. 동생과 나의 동반 대학 입학 이후 기쁨에 취한 아빠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 번 더 홍콩을 방문하였고, 그 사이 아빠의 영향으로 중경삼림의 팬이 되어 있었던 나와 동생은 아빠와 함께 Cranberries 의 Dreams 와 그 곡의 홍콩 리메이크판으로 중경삼림에 삽입되었던 왕페이의 몽중인을 번갈아 들으며 복닥 복닥 한 홍콩의 거리 풍경에 취해 사람들 사이에 실려 다녔다. 대학교 2학년 때 교환학생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말도 안 되게 낮은 학점을 학교에 들이밀었을 때에도, 학점과 토플이 높은 친구들이 순서대로 미국, 유럽의 학교들을 골라내고 나에게 돌아온 선택권은 바로 홍콩대학교였다. 홍콩에 교환학생을 가겠다며 부모님에게 선언했을 때, 엄마는 안 그래도 공부 안 하는 애가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지 않으면 약사고시에 떨어질 것이라며 나의 홍콩행을 강력히 반대하여(매우 엄마답다, 나의 다른 매거진 '어느 우울증의 기록' 참조), 결국 이때의 홍콩과의 인연은 무산되었다.


본격적인 홍콩과의 인연은 가장 최근에 다녔던 회사를 다녔던 2016년부터의 약 6년간의 기간이었다. 2015년부터 미국에서 아시아로 막 진출하기 시작한 나의 전 회사의 아시아 헤드쿼터는 홍콩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국 비즈니스에 집중해도 잘 먹고살던 회사는 미국과 유럽 내 비즈니스가 포화에 이르자 뒤늦게 스멀스멀 아시아에 투자를 시작했고, 시장을 과대평가했는지 현금자산이 많이 남아돌았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회사에 비해 수상할 정도로 많은 직원들을 아시아 헤드쿼터에 고용했다. 그리고 과도하게 고용된 직원과 그들이 써야 하는 상당한 비용들은 각 나라 지사의 직원들을 뻔질나게 홍콩에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남는 비용으로 일을 만들어 내야 해 많은 직원들이 출장이 잦았고, 나 또한 한국 지사에서 일하는 약 3년의 기간 동안 약 열 번 정도 홍콩 또는 마카오 출장을 갔었다. 첫 회사로 비용이 모자란 회사에 다니며 어리다는 이유로 늘 출장에서 잘렸던 것과 달리 새 회사로 이직 후 맞게 된 잦은 출장은 늘 설레는 일이었다. 출장을 위해 준비할 일들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일이 끝나고 홍콩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러 다니고, 센트럴과 란콰이퐁의 유명한 바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이었다. 홍콩 도로 위의 무법자인 빨간 택시들과 이층 버스를 타면 손이 닿을 것 같이 아슬아슬 지나가는 한자로 쓰인 커다란 간판들, 아시아 국가에선 매우 희귀템인 트램과 어딜 가든 커다랗고 화려한 쇼핑몰, 언제 보아도 신기하고 아름다운 홍콩섬의 빌딩들의 야경.. 지금 생각하면 수박 겉핥기식의 방문이었지만, 장국영이 살았었고, 양조위가 호텔 라운지에서 브런치로 장미 잼을 즐겨 먹는다는, 주윤발이 등산복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홍콩은 방문할 때마다 설레는 곳이었다.


아시아에 많은 투자를 했던 회사는 출장도 많았지만, 많은 성과들 또한 만들어 내야 했고, 나는 거기서 열심히 갈려가며 일을 했다(또다시, 나의 매거진 '어느 우울증의 기록' 참조). 만족스러운 성과들이 있었고, 덕분에 아시아 헤드쿼터인 홍콩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홍콩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홍콩에 살았던 이 년간의 기간은 홍콩 사회가 전래 없이 암울했던 시기이고 지금도 그 사회의 우울함은 이어지고 있다. 한창 홍콩의 주요 번화가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가 격렬했던 2019년도 말,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들고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창 격렬했던 시위는 2020년 코로나와 송환법 통과라는 악재와 함께 잠잠해졌다. 홍콩인들의 그들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함께 통과하며, 직설적이지만 순수하고, 친절하면서도 전혀 보기싫지 않고 귀여운 면모로 뼛속부터 자본주의에 익숙해져있는 홍콩 친구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늘 함께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홍콩의 펜싱선수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첫 금메달을 땄을 때, 과하게 샴페인을 터뜨리는 홍콩 사람들을 보며 금메달 하나에 이렇게 며칠 동안 오바를 할 일인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슬쩍 비쳤다가 홍콩 친구가 해준 '이 금메달은 홍콩인들에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생긴 좋은 일이야'라는 말을 듣고, 바로 마음을 고쳐먹고 더 열심히 축하의 메시지를 날렸던 기억이 난다. 


홍콩을 떠나온 지금, 한동안 코로나 청정지역에 속했던 그곳엔 오미크론으로 인해 제 5차 대유행이 번져 사재기로 마트 진열대가 텅텅 비어있는 사진을 담은 뉴스가 연일 시끄럽고, 홍콩 친구들은 나에게 인스타 DM으로 저렴한 KF94 마스크를 구해서 보내   있냐 묻는다. 과도한 통제로 화가 나 있는  다른 친구들은 캐리람을 비난하는 메시지들을 인스타 스토리에 가득 채운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을 쓰리게 하는  보니, 아직도 나의 마음의 일부는 홍콩에 남아 있는 것을 느낀다.


전쟁통에서도 아기는 낳듯(?), 우울한 환경에서도 나는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과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홍콩을 떠나 그곳을 추억하는 친구들은 늘 #homekong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포스팅을 하곤 한다. 나에게도 달콤한 향기의 기억으로 시작된 Home Kong의 기억을 잊지 않도록 남겨보려고 한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구룡반도에서 바라보는 홍콩섬의 야경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