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전 회사의 보스를 만났다. 홍콩에서 일하기 전 한국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보스였다. 스타트업과 같이 새로 모든 걸 세팅해야 하는 회사에서 함께 일한 터라, 함께 일하는 동안 참 바빴지만 많은 걸 믿고 맡겨주셔서 일이 많아서 괴로웠지 사람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경험이 많지도 않은 나에게 많은 걸 해 볼 수 있게 판을 잘 깔아주셔서 그 판 안에서 내 맘대로 요리조리 놀아 볼 수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내 맘대로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임파워먼트가 무엇인지 보여주신 분이었다. 그렇다고 맘대로 내깔려 둔 것도 아니고 낄낄빠빠의 달인이어서 뭔가 곤혹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이 오가고 있다 싶으면 슥 끼어들어 정리해주시곤 하는 분이었다. 개인적인 내 삶도 꽤 이해해주시는 편이었어서 전 애인과 헤어진 다음날에 상대방 회사와 거대 프로젝트를 담판 지어야 했던 날, 상대 회사 앞 까페에서 매니저 앞에서 나도 모르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본인도 눈시울을 붉히시던 분이었다.
몇 달 전 그분께 휴식 후의 커리어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내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당분간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나 맡겨주셨다. 일을 안 한 지 일 년 여가 넘어가며 슬슬 권태가 몰려오던 와중이라 감사하게 일을 받았다. 감사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전무님이 일하는 회사 근처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변함없이 일을 사랑하는 모습과 새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일과 사람 모두 잘 꾸려가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좋던 와중이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분이긴 했다. 회사 타운홀과 같은 큰 행사에서 희귀병 환자들 관련 발표를 하다가 울먹이신 적이 몇 번 있었다. 다른 회사와의 미팅 자리에서도 암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울먹이실 때가 있었다. 많은 제약회사들은 직원들에게 회사의 일이 환자의 생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며 죄책감을 심어 일을 하게 만든다. 나도 회사의 가스라이팅에 쉽게 농락되어 죄책감과 의미부여를 동력으로 일할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보이는 매니저의 눈물은 나도 당황스러워서 악어의 눈물인가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오래 지켜본 결과 결론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을 그만두기 전에 회사에서 무엇이 힘들었는지 물어보셔서 대답하고 있었다. 내가 그만두기 전 홍콩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건 알고 계셨다고 했다. 홍콩에서의 매니저가 힘들어하는 나를 두고 한국에서의 매니저였던 전무님에게 상담을 했던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시다 갑자기 눈이 빨개지시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해지셨다. 왜 그렇게 힘드냐고. 그러다 본인의 삶의 동력인 종교를 3년 만에 다시 나에게 권하셨다.
처음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를 안쓰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힘든 일이 있으신 건가?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그러다 그 눈물이 나를 향한 것을 한참 후에 깨달았다. 눈물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내 마음이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나 불쌍한 건가..?
우울증 약을 끊은 지는 이제 8개월이 되어간다. 우울증이라는 병의 경계란 참 모호해서 약을 끊으면 우울증이 다 나았다고 할 수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금은 2주 이상의 기분부전은 없어서 이 전만큼의 우울증은 앓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병의 상태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물을 보는데 다시 우울증 환자가 되어버린 나의 기분은 딱히 좋지 않았다. 불쌍히 여겨지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전무님의 눈물과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내 마음을 돌아보며 우울증 환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그간 내가 우울증을 고백했을 때 돌아왔던 반응들부터 떠올려 보았다.
우선, '같이 울어주는' 유형.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당사자가 '나 사실 우울증을 앓고 있어'라며 상대에게 고백할 당시에 그 상대가 나의 우울증 이야기를 경청해주며 눈물을 보인다면 나의 힘듦이 공감받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 나보다 격한 감정으로 하늘이 무너진 듯이 울어버린다면 나의 병의 심각성이 그의 눈물만큼 과하게 느껴져 더 슬퍼질 것이다. 그리고 나의 최근 경험처럼 한참 지난 시점에 우울증에서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울어버린다면, 울음의 시점을 확정해 주어야 한다.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는 이 시점이 불쌍해져 버리면 안 되니까.
두 번째,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형. 해결책 제시는 수많은 연인 관계에서 금기시되는 고민상담 방식인데, 우울증 환자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유형은 내가 우울증을 밝혔을 때 꽤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이었다. 운동을 해보라던가, 내 삶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보라던가, 밖에 좀 나가서 산책을 해보라던가.. 심지어 부모님은 결혼을 하면 우울증이 나을 것이라고도 했었다. 하하.
정말로 해결책 제시는 그 어떤 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인의 우울증을 인식하고 있는 환자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았든, 진단은 받지 않았지만 우울증인 것 같다는 인식을 한 사람이라면 약을 먹기 위해 병원을 갔을 것이고, 또는 상담을 받고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봤을 것이기 때문에 우울증을 앓지 않은 사람보다 그 해결책은 더 잘 알고 있다. 운동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감사일기를 써보고, 햇빛을 받으려고 나가보고 이 모든 것은 네이버에 우울증 세 글자를 검색만 해도 나오는 내용이다. 우울증 환자가 모를 리가 없다. 해결책 제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 번째, '그거 나도 겪어봤는데' 유형. 어떤 유형에게는 나의 우울증 고백이 본인의 경험담 썰 풀기를 불러일으킨다. 나도 우울한 적이 있었다며, 생각해보면 대입 실패 했을 때 우울증이 왔었던 것 같다며, 몇 달간 방밖을 나오지 않았었다라던가 내가 선을 줄창 보는데 이상한 남자만 나와서 우울증이 왔었는데라던가.. 나의 우울증의 기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 이야기로 넘어가는 형태의 반응은 어렵게 꺼낸 우울증 고백을 허탈하게 만든다. 장시간 고민하다 꺼낸 말이 전혀 공감받지 못했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므로.
그럼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느냐. 사실 우울증이 심했을 때는 사람과의 교류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커다란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이 편했던 형태는 나의 우울증에 어떠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네가 어떠해서' '네가 원래 기질이 이래서'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는 전제를 깔지 않는 현재의 괴로운 마음 상태에 대한 위로와 공감. 판단되지 않은 사람은 흐를 수 있다. 판단되어 버린 순간 정의되어 고여버린다. 고여버린 마음은 물때를 남긴다. 힘에 부쳐 닦아내지 못한 물때는 곰팡이를 틔운다.
며칠 동안 전무님의 눈물을 되돌아보며, 그 눈물은 2년 전 힘들었던 나에게 보내는 눈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홀로 타지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나를 향한 눈물. 사후 공감의 형태로라도 공감받은 걸로 생각하니 내가 좀 덜 불쌍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