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보신각종이 치려면 두어 시간 남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뱃속이 너무 허기졌다. 힘이 빠지고 주린 배를 채우러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식당들은 이미 사람들의 술기운에 시끌벅적하다. 그 옆 감자탕 집에는 그나마 사람 수가 적게 보인다. 터벅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 혼자 조용히 뼈다귀 해장국 한 개를 주문한다. 소주도 한 병 시켜 서너 잔에 목에 훌쩍 다 털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하지만 다음날이나 새해 첫날 오전 7시 출근, 근무 일정에 소주 대신 찬물을 연신 목에 부어 넣었다. 감자탕을 어떻게 먹었는지, 돼지 등뼈에 붙어있는 살코기와 시래기 줄기가 내 입으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2.
"이 혈관. 비장정맥인 것 같아. 잡아도 될 것 같아."
잡아도 된다고 의견의 피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구를 이용하여 혈관을 가리키며 나에게 이 수술의 길을 알려주고 있다. 너무 당황한 나는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굵은 정맥 하나는 덥석 잡아 묶어버리고 싹둑 잘랐다. 내 바로 앞에서 수술을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다. 나보다 선배 외과의사이지만 이 수술을 집도의는 나이고 내가 이 환자의 주치의다. 속으로 이 환자의 집도의를 바꾸고 내가 건너편 제1 조수의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굴하고 비참, 간사한 마음일 수 있다. 너무 당황한 나의 마음에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더 무엇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되고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환자가 살기 위해서라면.
머릿속에서 '포기'라는 글자, 그리고 환자의 사망진단서 작성, 사인이 무엇인지를 적는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 순간 '비장정맥을 잡아도 될 것 같아!' 이 말에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포기, 절망, 암담. 그 많은 단어들 사이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보았다.
상장간정맥과 비장정맥, 하장간막정맥이 만나서 간문맥을 이루고 이것이 간으로 들어간다. 대정맥을 제외한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정맥이 모이는 곳이다. 이론상을 쉽고 20여 년 전 해부학 시간부터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막상 이 혈관들이 찢겨나가 피가 솟구치는 상황에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도저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갈기갈기 찢긴 정맥을 보면서 나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뚝뚝 떨어지는 혈압 숫자들, 모니터 숫자에 침이 바짝 말라간다. 어떻게,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1+1=2 딱 정해진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거나 나사를 조여 맞추는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한다면 이런 암담한 상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장 난 차를 폐차 시켜버리고 돈이 많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새롭게 차를 사버리는 것이 좋을 수 있지만 지금 너무나 피가 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수술 집도하는 나, 그리고 환자 머리 위에서 환자에게 피와 약을 쏟아붓고 있는 마취과 선생님이 같은 마음이다.
'에피 두 개 주세요'
마취과 선생님 덕분에 가까스로 환자는 버텨주었고, 내가 갈기갈기 찢어진 혈관을 봉합하고 비장정맥을 묶을 시간을 벌었다. 아직도 환자 뱃속에는 주르륵 흐르는 핏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모든 출혈 부위를 다 지혈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 무리다. 이런 경우 손상통제수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의 찰나를 넘겼다고 하더라도 환자가 갈 길은 멀다. 심장이 뛰고 혈압이 유지되고 큰 출혈 부위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넘어가야 할 산들은 수십 개도 더 된다.
[ 에피네프린 : 응급상황에 환자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상승시키기 위한 약이다. 심장마비가 발생하였을 경우 심장이 다시 뛸 수 있게 강심제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
[손상통제수술 : 모든 근본적인 수술을 할 수 있는 환자 상태가 아닌 경우, 최소한의 반드시 필요한 수술만으로 진행하고 임시로 배를 폐복하고 환자 상태가 회복된 후 다시 수술하는 것을 말한다. ]
3.
다음 해가 되었다.
1월 1일.
나를 대신하여 전날 근무, 당직을 하면 환자를 봐주신 선생님, 당직자들 덕분에 환자는 아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출혈 부위가 멈추고 있다. 출혈 부위에 넣어놓은 배액관에서 나오는 빨간 혈액이 점차 옅어지고 양도 줄어들고 있다. 또다시 수술을 거치고, 각종 장기 부전으로 폐렴, 신부전 등 많은 고비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