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것 너무 맛있어요!’
시금치
1.
시금치란 비타민, 철분, 식이섬유 등 각종 영양이 다량 함유된 녹황색 채소이다. 내한성이 강해 가을, 추운 겨울에도 잘 자라며 이때 시금치는 비타민 C 가 더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주로 겨울에 시금치무침, 시금치 된장국을 많이 해주셨다. 시골에서 겨울에도 밭 구석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시금치를 키워 아들에게 비타민을 듬뿍 먹여주고 튼튼하게 자라게 할 마음으로 시금치 요리를 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선뜻 시금치에 젓가락이 잘 안 갔다. 나에게 아빠는 뽀빠이도 시금치를 먹어서 건강하고 힘이 세다고 많이 먹으라고 강권을 하기도 하셨다. 마지못해 젓가락이 시금치가 담긴 접시로 몇 번 향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의 입맛에는 시금치는 들에 자라는 어느 풀 인가하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로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였다. 시금치를 입안에서 계속 씹어도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게 먹었다. 어린 나의 머릿속에는 엄마가 언제쯤 달짝지근한 소시지, 오징어채 반찬을 해줄지를 기다리곤 하였다. 그러나 소풍 갈 때 먹는 김밥 안에 들어간 시금치는 소시지에 맛이 가려져 시금치인지 모르고 먹곤 하였다.
2.
‘아빠, 이것 너무 맛있어요!’
‘또 먹어도 돼요?’
이제 다음 달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딸아이가 말한다.
신기하였다.
나는 그 나이 때 시금치 맛을 모르고 마지못해 젓가락이 가곤 하였으나, 요리하는 아빠의 옆에서 처음에는 비닐장갑을 낀 아빠가 집어서 입에 넣어주는 시금치를 맛있게 받아먹는 딸아이가 대견하고 신기하였다. 덩달아 저기 멀리 있는 아들아이도 나도 달라고 한다. 온 가족이 무침을 하는 커다란 그릇에 담긴 시금치를 경쟁하듯이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한다. 뭐니 해도 손으로 슬쩍 집어먹는 무침 요리는 젓가락을 거치는 것보다 두 배는 맛있다. 슬그머니 딸아이는 엄지를 치켜세워 아빠에게 보여준다. 딸아이의 엄지가 거짓말 인가하여 나도 시금치 한입을 먹어보니 정말 꿀맛이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맛과 동시에 입안 가득 달콤함이 씹으면 씹을수록 더해만 갔다.
순간 이상하였다. 몇십 년 전 엄마가 해준 시금치는 분명 이 맛이 아니었는데. 달라진 것이라면 몇십 년 동안 시금치 씨앗이 개종되었고, 내가 쓰는 양념 중에 아주 오래전 엄마가 쓰던 양념에서 '연두'라는 인공 양념이 하나 추가된 것 밖에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 더 굳이 꼽자면 엄마의 손과 나의 손이 다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빠의 메인 요리 중 하나가 시금치무침이 되었다. 딸아이가 아빠의 메인 요리를 선택해 준 것이다.
3.
마트 전단에 섬초라고 쓰인 것이 눈에 띈다. 생긴 모양은 딱 시금치 모양인데, 이름이 섬초라고 왠지 신비로운 이름이다. 초록 창에서 찾아보니 전남 비금도라는 섬에 자라는 시금치이며 비금시금치라고도 한다. 한겨울 추위에 바닷바람을 이기며 자라서 일반 시금치와는 달리 잎도 두껍고 씹는 맛과 당도도 높다고 한다.
오늘은 너로 선택이다. 섬초.
한단으로는 부족하니 두 단을 덥석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무침 요리에서 야채를 뜨거운 물에 풍덩 한 후에는 양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지난번 아들딸이 시금치무침에 대한 반응을 보자면 우리 네 식구에게는 한단으로 턱도 없을 것이다. 우선 시금치를 손질할 커다란 바구니를 여러 개 준비한다. 동시에 미리 커다란 냄비에 물을 적당량 넣고 소금 한 스푼을 넣은 후 끓이기 시작한다. 뿌리 부분이 영양성분이 많다고 하지만 나는 뿌리를 과감히 자르면서 섬초를 다듬는다. 역시나 섬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것인지 전에 사서 먹었던 굵직한 시금치에 비해 조그맣고 흙이 많이 묻어있다. 이제 깨끗하게 씻은 섬초를 방금 전 팔팔 끓기 시작한 냄비 속으로 투척한다. 어느 요리에서나 이 데침 시간이 너무 어렵다. 오늘 같이 두 단을 사서 야채의 양이 많을 때는 파워블로그에서 이야기하는 뒤집기 전 10초, 뒤집고 20초라는 것은 무리이다. 나의 방식대로 두 단 분량의 많은 섬초를 한꺼번에 끊은 냄비 속으로 쑤셔 넣는다. 집게와 국자를 양손에 잡고 마음속으로 30까지 세면서 뒤집으면서 색깔을 째려본다. 초록색 본연의 색깔에서 좀 물을 먹은 진한 초록색으로 변하면 바로 불을 끈다. 뜨거운 냄비에서 건지 시금치는 체에 밭쳐 물을 뺀다. 이제 다음 차례는 시금치무침의 하이라이트인 무침이다.
미리 조그만 접시를 준비한다. 냉장고 여기저기에 숨겨진 갖은양념들을 꺼낸다. 다진 마늘, 참기름, 국간장을 기본으로 하고 최근 내가 선호하는 연두라는 제품화된 첨가제도 준비한다. 양념의 비율을 블로그에는 한 스푼, 두 스푼이라고 친절히 적혀있으나, 지금은 내가 셰프이기 때문에 나의 눈대중으로 한다. 단 참기름과 깨소금은 듬뿍 넣고 소금이나 간장은 최소한으로 하는 나의 원칙을 지킨다. 미리 섞은 양념을 데쳐진 섬초 위에 골고루 뿌린 다음 비닐장갑을 낀 나의 손을 이용하며 맛을 구석구석 스며들게 한다.
맛은 입과 혀로 느끼지만 요리하는 사람의 맛은 손끝과 눈으로 느낀다. 오늘의 섬초 무침도 나 스스로에게 훌륭한 점수를 준다. 언제 왔는지 딸아이는 입을 벌려 섬초무침을 달라고 한다. 한번 먹고 엄지를 힘껏 세워 보여주고 이제부터 조그마한 딸아이 손으로 마구마구 집어먹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