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초저녁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 119 대원의 몇 마디에 꾸벅 졸고 있던 잠이 확 달아났다. 아직 시계 작은 바늘이 10 숫자를 갓 넘긴 시간이었다. 밤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병원에서 10시는 아직 초저녁이다.
무거운 눈꺼풀, 머리를 짓누르는 잠을 확 날려버리고 다시 방금 말한 119 대원의 말을 하나씩 리뷰해 본다.
'60대 남성, 복부 자상, 피, 싸움, 복부 소장이 돌출'
그다음 혈압과 다른 정보들을 들려주었지만 기억이 안 난다. 우선 이송시간이 10여 분이라고 말한 것이 마지막으로 기억이 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여 분. 잠시만의 여유, 단잠을 잘 수도 있지만 그럴 사치는 안된다. 나에게 10여 분, 동시에 이곳 외상센터 사람들에게도 같은 10여 분이란 시간인 것이다.
2.
운동에 있어 몸풀기는 중요하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가 아닌 충분히 준비운동, 안 쓰던 근육을 충분히 이완시켜 주어야 실전에서 폭발적인 스피드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마치 내가 100미터 출발점, 아니 마라톤 출발 직전에 몸을 풀고 있는 선수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한다.
가장 우선 마음속으로 깊은 심호흡을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안타까운 사건, 사고로 다친 환자들 치료하는 것이 흔쾌히 마음이 내키고 보람이 있다. 반대로 칼과 관련되어 싸움 등으로 발생하여 다친 환자들 치료를 탐탁지 않다. 그러나 몸에 피가 나고 다친 사람들을 어찌 골라서 선택해서 치료할 수 없기에 마음을 꾹 누르고 해야 한다. 몸풀기 첫 관문이 심호흡이 그래서 중요하다. 어떤 이유에서 사고, 다친 것은 잊기로 하고 곧, 10분 뒤 내 앞으로 올 환자를 잘 회복시켜 집으로 보내는 것을 1차 목표로 하자는 마음을 되새긴다.
이어 나를 도와줄 사람들을 섭외한다. 이미 이곳에 수년간 같이 손발을 맞추던 의료진들이 권역외상센터에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지금 근무자들이 누가 있고 혹시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또 다른 의료진들이 병원 내에 누가 있고 안되면 집에 있는 의료진도 호출해야 할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 응급실에 있는 의료진들에게 방금 내가 들은 환자 정보를 공유하고 10분 뒤 상황, 가상의 시나리오를 미리 말하고 각자 역할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잠시 시간이 나면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순간 내 머리 안에 포도당과 카페인이 동시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보충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것은 믹스커피다. 다행히 내 시야에 믹스커피가 보인다. 종이컵에 정수기의 따뜻한 물과 믹스커피를 함께 넣고 휘휘 돌리면 바로 나의 필수 에너지원으로 변한다. 사실 이 순간이 가장 좋기도 하지만 슬프다. 믹스커피에 설탕과 프림 성분으로 늘어가는 뱃살, 지방을 생각해 가급적, 최대한 먹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지금은 뱃살이고 지방이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10분 상황, 그리고 이어서 최소 서너 시간 동안 내 몸이 버텨주고 머릿속과 손놀림이 한치도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믹스커피의 따뜻한 물이 들어가면서 동시에 머리 안에 나의 뇌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들어간 순간 나는 이제 모든 환자들을 수술, 치료할 힘이 가득 생겼다는 자신감이 풍만하게 되었다.
한 가지 빼놓은 준비가 있었다. 이곳 응급실은 환자를 맞이하고 초기 처치를 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복부에 장기, 소장이 돌출될 정도의 자상 환자이면 혈압도 불안정할 것이다. 그렇기에 몸에 굵은 혈관을 꽂을 준비도 하고 동시에 수액도 충분히 미리 챙겨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곳 응급실에서 초기 처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자는 수술실, 중환자실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방금 전까지 전산, 모니터를 통해 사용 가능한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있다고 확인하였으나 나는 다시 한번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한다. 입안에 다행히 아직까지 커피 향이 달콤하게 퍼지고 있어 마음이 안정된다.
3.
마지막 심호흡과 동시에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역시 오늘도 나의 준비과정은 완벽하였고 정확하게 시간을 맞췄다. 나의 마음과 달콤함과 카페인으로 재충전한 머리도 환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구급차 침대로 누워 들어오는 환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내가 큰 소리로 이것저것 지시를 해야 하기도 하지만 이미 수년간 훈련되고 약속된 이곳 의료진들이기에 환자 도착과 동시에 각자 본인들의 일을 시작한다. 혈압을 비롯하여 심박수 측정을 위한 모니터를 환자에게 부착하고 동시에 환자 팔뚝에 혈관주사를 잡기 시작한다.
환자는 손에도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전형적인 칼로 인한 자상 환자의 특징이다. 상대방의 칼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저항의 흔적인 것이다. 환자 혈압은 낮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상 범위에 가까스로 걸쳐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다음 차례는 119 대원이 커다란 거즈와 붕대로 감아놓은 복부 자상 부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후 시티 검사를 통해 내부에 큰 혈관이나 장기 손상 부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육안적 소견도 중요하다. 혹시 모를 추가 출혈을 대비하기 위해 충분한 거즈와 드레싱 준비를 하고 붕대를 열었다.
나는 그 순간 입가에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동시에 10여 분 전 괜히 안 먹어도 되는 믹스커피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119 대원이 고맙다는 생각도 스쳤다.
사전 연락을 받은 복부 내부 장기, 소장이 돌출되었다는 것은 환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루였던 것이다. 환자는 이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고 장루를 복벽에 나오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환자가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 20분. 응급실 초기 처치부터 수술 준비, 이어 수술까지 이어지면 새벽 2-3시는 훌쩍 넘어갈 것이다. 이날 나의 처치는 환자 손에 작은 상처 봉합 10분으로 끝났다. 환자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119 대원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였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 10여 분 동안 나의 루틴대로 심호흡부터 시작해서 믹스커피, 마무리 심호흡까지 완벽하였다!
[ 장루 : 직장암 등 복부 수술을 받고 대변 배출을 위해 복벽으로 우회로를 만든 것을 말합니다. 소장이나 대장 일부를 복벽 밖으로 1~2cm 돌출되어 그 장을 통해 대변이 밖으로 배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