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신해 무섭고 힘든 일을 하다 다쳐 오는 것은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최근 두 차례 수술 끝에 건강을 회복 중인 ㄱ씨를 보고 있으면 몇 해 전 떠난 네팔 청년이 머릿속을 맴돈다.
“기계로 골반 압착 손상받은 20대 환자입니다. 혈압도 안 잡히고 의식도 없습니다.”
환자를 이송하는 119 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머리에 웅웅 울렸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꿈을 위해, 먼 아시아 어딘가에서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을 찾아왔을 청년이었다. 얼마나 무거운 기계에 깔린 것인지 골반과 허벅지가 연결된 부위가 아예 으스러져 있었다. 응급실에 대기하던 의료진 열명 남짓이 일제히 달려들어 입과 목, 가슴 등에 관을 꽂아 넣자 그제야 모니터에 혈압 숫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찍은 시티(CT) 사진에서는 청년의 몸과 양다리가 가는 살점 조각 몇 가닥으로 가까스로 연결돼 있었다. 혈관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치료 이후의 삶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환자를 살려내기 위해 하반신을 절단했다.
몸뚱이만 달랑 남은 아시아 청년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중환자실 모니터에 보이는 숫자들뿐이다.
청년을 뒤따라 병원을 찾았던 회사 관계자들은 중환자실 앞을 어슬렁거리며 휴대전화로 어디론가 상황을 보고하더니, “상태가 안 좋아지면 연락 주세요”라고 말한 뒤 병원을 떠났다. 생존을 위해 다리마저 잘라냈지만 청년은 다음날 숨을 거뒀다. 몸통과 다리가 분리된 영혼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을까. 한국 땅이 낯설었을 영혼은 고향인 네팔까지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의 으깨진 다리와 잘라낸 몸통은 차디찬 영안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용노동부 산업재해 발생 현황을 보면, 2019년 한 해 산업재해로 인정된 노동자는 10만여 명이고, 사망자는 그중 100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숫자 안에 84만여 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사고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한국에 없었던 그 네팔인 청년은 흔한 산재 서류 하나 받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롭게 숨을 거둔 네팔 청년을 보면서 1988년 숨을 거둔 17살 소년(그나마 출생신고가 늦어 호적상 나이는 15살에 불과했다) 노동자 문송면을 생각했다.
고향인 충남 태안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앳된 소년은 온도계 공장에 취업해 수은을 주입하던 일을 시작하고 몇 달 만에 수면장애, 구토증세 등의 증상을 겪게 됐다. 고통을 호소하는 문송면에게 회사는 ‘업무상 요인으로 발생한 상해가 아니’라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할 뿐이었다.
몇 군데 병원을 찾아도 병명을 알 수 없어 무당을 불러 굿까지 했던 문송면에게, “그런데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었던 의사가 없었다면 ‘수은 중독’이라는 그의 병명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소식을 보도한 언론이 없었더라면,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은 시민들과 정치인이 없었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받는 일은 좀 더 지연됐을지 모른다. 결국 문송면은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불과 며칠 만에,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지만. 의식조차 없는 상태로 응급실을 찾았던 네팔인 청년이 만약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면 의사로서 나는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까.
그가 한국 땅에 머물다 간 짧은 시간에 대한 기록은 이제 단신 기사 한 토막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숨을 거두고 한 달여 뒤 우연히 발견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에 온 지 보름가량밖에 되지 않은 20대 네팔 이주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 네팔 이주노동자 덜라미 머걸(23)씨는 지난 11일 낮 12시 10분쯤 대전 대덕구 대영금속공업에서 (…) 작업 중 이미 세워진 조형틀이 넘어지면서 해당 조형틀에 깔렸다. 머걸 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지난 12일 끝내 숨졌다.”(2019년 10월 15일,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