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개천 집 ​

1. 집 없을 두려움 2. 사실도, 사실이 아닌 것도 기억으로 남는 다면

by Auntie J

1. 집 없을 두려움

썩 훌륭하지 않은 기억력 탓일까?

초등학교 1학년부터 더듬어도 이 기억이 그때 것인지, 좀 지나서였는지 한참을 애써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해도 결론은 그저 뿌연 기억들뿐이다.

기억해야 득 될 것 없는 뿌옇기만 한 옛 기억을 굳이 파헤쳐 나란히 줄 세워 보려는 이유?

본능적 호기심 때문이다.

과연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내 기억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난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자란 걸까?


내가 태어난 곳은 마포다.

물론 들어 아는 사실.

집에서 나를 받으신 것은 아니시니 아마도 마포 어느 개인 병원에서 태어났을 거다.

예전 부모님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의 부모님도 어느 한 분 친절하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야기를 자분자분 들려주신 분들은 아니셨다.

아니다.

부모님의 양육 스타일과 상관없이 나고 자란 과정이 딱히 특이할 것이 없어 기억이 안 나는 걸 수 도 있다. 게다가 이미 여기저기서 듣고 읽어 깊이 동감했던 이야기들이 내 서사에 겹쳐져 내 또래 다른 누구의 그 시절과 나의 그것이 구분이 안 가는 지경이 된 걸 수도.


뭐 어쨌든, 거기서 거기인 시절을 보낸 것은 틀림없다. 그런 기억 속, 나의 첫 우리 집이 마포 개천 집이다.


마포 집은 스토리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플래시백처럼 문득문득 떠오르다 사라지는 결말 없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정 중앙엔 이름 그대로 개천이 흐르고 있다. 가늘지만 선명하게 검은색이던 개천, 그렇다 똥 개천!

그 누구의 유명한 노래 속 고향은 넓은 들판에 실개천이 흐르는 한 편의 풍경화이더만 내가 태어난 고향, 서울 마포엔 유유히 똥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개천 속 내용물에까지 관심을 두고 싶진 않지만 선명한 검은색은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코를 틀어잡게 하는 후각 이미지와 상상 가능한 시각 이미지를 함께 제공하는 법...

하필 그곳이 내 고향이었던 거다!


내 맘에 들건 안 들건 개천은 범 같이 설치는 아이 셋을 단번에 통제할 수 있었던 엄마의 가장 좋은 조력자였으며, 어엿한 대문을 여닫고 사는 집 자식들에게 우리와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 태도를 가르칠 좋은 교재였던 듯하다. 학령기 이전으로 추정되는 1970년대 초반, 남아 선호 사상이 육아 원칙의 전부였던 우리 집의 절대강자는 2살 위 오빠였고 그랬기 때문에 끊임없는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집안이 시끄러워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개천에 내다 버리겠다는 엄마의 강력한 협박이 이어졌고, 협박은 암묵적 정전사태와 함께 개천에 대한 두려움을 제대로 자리 잡게 했는데, 세상모르는 꼬마에게 집 아닌 다른 곳으로 내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기막혔겠지만 무엇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개천가의 거지 아저씨였지 싶다. 거지 아저씨는 내가 먹고 잠자는 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서 살고 있는,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그 누구, 상황이었다. 천막을 쳐 놓은 것인지 거적 대기를 세워 바람을 막으려 했던 것인지, 무언가 잔뜩 쌓이고 겹쳐 있던 아저씨의 집 주변엔 출처가 불분명한 세간이 널려 있었고, 개도 한 마리 동거하고 있었던 듯. 그때만 하더라도 개는 개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명체로 대여섯 살짜리 꼬마에겐 말도 안 통하고, 수틀리면 물어서 모든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는 막무가내의 존재였다. 물론 거지 아저씨의 일상과 행동, 그리고 동거 개에 대한 특별한 에피소드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러나 뿌연 기억 속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을 정도의 강렬함이라면 당시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을지 이해가 갈 만하다.

다행히 엄마는 성가신 말썽 정도에 자식을 내다 버릴 정도로 모진 성품은 아니셨고, 실천력 또한 기막힌 분도 아니셨다. 하지만 때론 행동만큼 충분히 두려울 수도 있는 게 협박 아니던가.

지금 생각하면 오직 엄마의 단순한 협박만으로 거지 아저씨가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던 듯.

아마 집안 관계자든 이웃 어른이든 누군가 특별한 목적 없이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쓸데없이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였을 테고 그 이야기에 질린 꼬맹이는 부산함을 잊고 천에 없는 순한 모습으로 얼어 붙었을 테니 그 얼마나 고소한 장면이었겠나.


경험해보지 않고도 짐작되는 다양한 종류의 두려움들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닌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감당이 안 돼, 부디 나만은 피해 가길 소심하게 주문해보기도 하지만, 물론 그것도 잠시. 살다 보면 일상에 치여 두려움이고 뭐고 잘도 잊어버리고 또 살아내기 마련.


그 시절 우리 집 앞 똥 개천은 나에게 집 없을 삶이란 곧 두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단단히 갖게 해 준 원천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붕 밖에서 춥고 배고프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성실히,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미련하게 단순한 공식을 입력시킨 듯하다(과연 열심히 일만 해서 내 집을 가질 수 있는지 아닌지 심하게 회의가 들긴 하지만). 결국 다섯 살 즈음부터 내 집을 가져야 한다는 때 이른 목적의식의 싹을 틔우며 집 없을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열댓 군데의 집을 떠돌 수밖에 없는 삶을, 나는 살고 있다.

잘도 잊어버리고 잘도 살아내고 있는 거지.


다행히 지금은 집이 없는 삶이란 두렵다기보다 고단한 삶이라 여겨진다.

집으로 인한 정체불명의 두려움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안함으로 희석됐고, 불안함은 다행히 먹고사는 분주함에 밀려 불편한 고단함으로 정리가 됐지만 아직도 떠도는 고단함이 정착의 안정감으로 언제 바뀔지는 장담 불가다. 뭐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우선은 돌아가 몸 누일 곳이 있어 고마운걸.



PS) 누구보다 빨리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게 해 주신 시대를 앞서간 엄마의 교육전략과 철학에 경의를!!



(그림 from Pixabay)


2. 사실도, 사실이 아닌 것도 기억으로 남는다면..


마포 개천 집은 믿을 만한 기억에 의하면 개량 한옥 정도 되는 어정쩡한 스타일의 주택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물을 길어 올리는 펌프가 있어 빨래는 물론 지금으로 치자면 화장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마당에서 해결했다. 부엌도 계단을 내려가야 본격적인 부엌일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듯한데, 부뚜막이었는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부뚜막을 막아 놓은 건지 그 위엔 큰 솥도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살림을 살기엔 그냥 불편하기만 한 구조라 하겠다.

그리고 방의 개수는 기억의 의하면 2개. 댓돌을 밟고 올라가면 바로 거실(텔레비전이 자리한 곳은 무조건 마루라는 고루한 사고방식)겸 마루였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2개가 있었던 듯하다. ‘ㄱ’ 자를 왼쪽으로 뒤집어 놓은 구조라 함이 적당 하겠다.

거주 멤버를 살펴보면, 엄마, 아빠, 2살 위 오빠, 2살 아래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다섯 식구에 상주하는 가정부 언니 한 명 더. 그 시절 가정부라니 돈 꽤나 있었던 집안인가 싶겠지만 실상을 이야기하자면 매우 긴 스토리이니 우선은 생략.

그런데 여기서 대략 끼워 맞추기가 난감해지는 부분이 생긴다. 상주 가정부, 숙이 언니 외에도 많은 시간을 우리 집에서 보냈던 또 다른 인물, 막내 외삼촌이 상주 비슷한 형태로라도 거주 인원에 포함되어야 마포 개천 집 기억이 그나마 완성이 되는데, 기억 속 방 2개로는 도저히 상주인원들의 안정적인 거주가 보장이 안 되는 꼴이다. 아마도 방이 하나 더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잠시 다녀갔던 외삼촌이 상주 멤버로 기억될 만큼 강렬한 무언가를 남기고 떠난 걸 수도 있다. 숙이 언니 역시 잠시 거주했었거나 혹은 외삼촌과 숙이 언니가 거주했었던

시기가 아예 다른 시기였을 수도 있다.


이렇듯 인간의 기억은 전적으로 의존하기엔 도저히 신뢰가 안 가는 장치다.

오직 기억에 의지해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사실도 조금만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따지고 들어가면 믿음 자체가 허술해지기 일쑤다. 상상과 현실을 편의에 따라 적당히 섞어 놓은 것을 나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라고 부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거다.

때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내기도 하고, 작은 사건에도 어찌어찌 의미를 부여해 그럴싸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이 기억과 저 기억이 서로 섞인 경우는 또 어떤가! 아! 기억하기의 부질없음이란!

그럼에도 때론 의지와 상관없이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한동안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는데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나는 그렇다.

내가 몸소 겪은 사람들이라면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관계가 정리되면서 기억에 관한 느낌도 정리가 되기 마련. 즉, 받아들이든 소각시켜 버리든 선택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런데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인식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은 잘 없어지지도 바뀌기도 힘들다.

마포 집이 내 기억 속 첫 우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 한 번 다시 해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찾아가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여서 그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들겠지만) 그 집에 거주하지 않았었음에도 거주한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뒷 담화의 배경으로 유난히 그곳이 많이 등장했었기 때문이다.

아마 엄마의 시누이들, 그러니까 내 고모들은 엄마가 딱히 마음에 드는 올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인류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고수하는 한 어떤 세대에서도 두 가족이 한 가족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갈등 구도는 (새로운 갈등 구도가 생산되면 생산되었지) 사라지지 않을 거다 에 무조건 한 표지만 왜 엄마세대의 고부 갈등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들어주려 해도 유난히 치사하고, 때론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지..

계모 아래 자란 시누이들의 막내 남동생에 대한 애정과 끝나지 않은 교육은 엄마의 결혼 초창기 1970년대를 관통하며 8,90년대까지 화려하게 수놓았으니 결국 엄마의 결혼 생활은 곧 시누이들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겠다. 구구절절 수많은 에피소드를 여기서 읊어봐야 어디선가 들었던 그때 그 이야기를 재탕하는 듯할 테니 자세한 에피소드도 역시 생략. 이렇게 지지리도 싫었던 엄마의 시누들에 대한 아픈 기억은 딸들이 철들기 전부터 여과 없이 120% 전달되었고 엄마를 홀대했던 고모들에 대한 편파적 기억은 결국 마포 개천 집 자체를 회색빛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기여를 한 듯하다. 결국 난 진작부터 고모들에 대한 감정의 균형을 잃었고

별 반전 없이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고모들을 배타시켰으며, 그분들이 집안의 어른들이란 생각을

갖질 못했다.


세월이 사람을 골라서 지나가 주는 것이 아니다 보니 고모 두 분 중 한 분은 세상을 달리 하셨고, 그 집안 자손들도 아마 장년을 훌쩍 넘어섰을 게다. 사촌지간임에도 그 집안 자손들과 거의 왕래하 않았고, 또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나는 과하게 감정이 상해 있었다. 이런 과정은 결국 친족임에도 남보다 먼 관계를 만들게 했고 이젠 길에서 만나면 과연 서로를 알아보기는 할까 라는 의문을 갖게도 한다.(이미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열댓 번 거주지를 옮겨 살면서 문득 옛 생각에 흠뻑 빠져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면 난 주저 없이 예전 그 장소를 다시 찾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마포 개천 집은 찾아가 볼 엄두도 못 냈고, 또 기어이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무조건 한 편이어야 했던 엄마가 죽도록 싫어하는 건 나도 의무적으로 싫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도통 떨어지질 않아서였을까.. 엄마와 고모들의 투쟁사로 얼룩진 우리 첫 집, 마포 개천 집은 그런 기억 속 집이다.


이젠 내가 그 시절 엄마보다 훌쩍 더 세월을 겪어 버렸다.

그러하다 보니 지끈지끈했을 그 상황이 과연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오지랖 넓게 궁금해진다.

일 없이 기억들을 들춰내 한 번 씩 다시 물어본다.


엄마는 고모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 이겨내셨을까?

정말 방법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방법이 있었어도 계속 불편하고 싶었던 걸까?

그냥 세월에 묻혀 지나가길 바랐었을까?

그렇게 모든 관계를 같이 보내 버려도 괜찮았던 걸까?


이제와 괜찮고 안 괜찮고 가 다 무슨 소용일까.


고모들도 아마 엄마만큼 충분히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셨을 거다...

(그림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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