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자취촌, 쪽방

: 선배는 나에게 영원히 옳다!

by Auntie J

집 하나 찾아가는 데 이리 힐끗, 저리 힐끗. 누구라도 알만한 사람과 마주칠까 신경 쓰는 폼이 과하다 못해 우습다. 소심하긴..


막다른 골목 끝 집,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집까지 대문만 세 개.

보통 자취 촌 주변 집 대문을 들어서면 안으로 자취방만 대 여섯 개는 기본이기 마련.

방 하나에 어디 한 사람씩만 살고 있겠나, 두세 명이 같이 쓰는 경우도 태반이었으니 이 시점에 누군가 나오면? 검은 비닐봉지 한쪽 옆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대파에 소소한 먹을거리로 짐작되는 작은 봉지들까지..

장을 봐온 게 틀림없어 보이는 모양새로 자취 촌 주변을 기웃거리자니 왠지 떳떳하지 않은 쓸데없이 예민한 이 기분이란..


겨우 자취방 찾아가면서 별 걱정을 다한다 싶어 보이겠지만 때는 지금 같지 않았던 1990년.

물론 남녀 칠 세 부동석 까진 아니었지만, 남자들만 득실득실한 자취방을 여자 혼자 장바구니 들고 다니는 일이 딱히 대놓고 할 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도 세상 쿨 한 척했지만, 딱 그런 ‘척’ 하면서 사는 정도의 그릇이었던 지라 약속된 자취방을 찾아가면서도 미적대기 일쑤였다.

괜히 긴장해서 이 방인지 저 방인지 가늠하고 있자니, 이미 도착해 있던 동기 둘과 선배가 내 인기척에 들어오라 반긴다. 옳다쿠나! 봐라, 여자가 나만 있는 줄 아느냐, 이미 둘이나 더 있다, 누가 묻지도 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혼자 당당해진 꼴이라니..


여자 키인데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굳이 역할을 주자면 현관문 정도 되는 자취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온통 시멘트로 미장을 한 부엌이 바로 나온다.

그런데 부엌이라기엔 부엌일을 해낼 싱크대도 없고, 찬장도 안 보인다. 낡은 코펠에, 분명히 돈 주고 산 것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이는 제각각 그릇이 몇 개, 거기에 딱 봐도 학교 식당에서 집어 온 것이 분명한 수저 서 너 개가 꽂혀 있는 500미리 호프 잔까지. 부엌 맞네!

한데, 대체 어디서 설거지를 하고, 밥을 차릴까.. 휙 둘러보니 바닥 구석에 두 뼘 정도 되는 빨간 고무호스가 매달린 수도꼭지가 보인다. 수도꼭지 아래 세숫대야, 설거지 세제, 비누까지 나란히.

부엌이면서 화장실 겸용이로구나. 정체 파악 끝.

이제 신발이 있는 쪽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이번엔 현관문 크기의 절반도 안돼 보이는 쪽문을 통과해야 한다. 어차피 만들 방문 좀 크게 만들지.. 머리를 찧지 않고 통과하려면 고개를 잔뜩 수그려 상체를 휙 디 밀면서 동시에 보통 계단 세 개 높이의 문지방을 타고 넘듯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걸 문이라고 해야 하나, 구멍이라고 해야 하나,. 방에서 밖으로 밖에서 방으로 뚫어놓은 구멍에 대충 문이라고 짜서 달아 놓은 형태.

어쨌든 진입 성공.

찌든 담배 냄새가 훅 끼쳐온다.

본능적으로 창문을 찾아보지만 눈에 닿질 않는 걸 보니 앞으로 최소 3-4시간은 그냥 참는 수밖에.

3-4시간 동안 담배들이나 피우지 말아줬으면 해 보나 별 소용없는 바람인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학교 근처라 학생이 살고 있는 방이 분명할 텐데 책 한 권 보이질 않고 앉은뱅이책상 하나 없는 것이..

대체 누가 주인일까...

허나 묻는다 해도 답은 없을 터, 그냥 ‘누군가는 살고 있겠지’로 호기심 마무리.


매주 혹은 길어도 격주에 한번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던 1980년대 말, 1990년 초,

자취방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묻지도 않고, 말해 주지도 않는 게 그 시절 그 모임의 원칙이었다.

과하게 너희끼리만 의식했던 거라 코웃음 친다면 뭐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인정.

허나 과해 보일 법도 한 형태의 보안 유지는 나나 내 동기 같은 피라미들 때문이 아니라 일 년에 한 번도 아니 졸업하는 그 날까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저 위, 위, 윗선의 그야말로 하늘 같은 선배라 불리던 몇몇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덕분에 우린 서 너 시간의 세미나를 위해서 서울 근교에 있는 대학교의 자취촌은 물론이요, 때론 고속버스를 타고 낯 선 동네 그 누구의 자취방까지 찾아다녀야 했다.

덕분에 다양한 지역의 주택과 방을 엿보고 다닐 수 있었는데, 모름지기 방이라는 것은 하루 건, 한 달이건 사람이 거주하며 먹고사는 곳인지라 작은 소지품이든 세간 어디에서건 주인의 취향이나 성향, 사는 방식이 드러나기 마련 아니던가. 그런데 당시 방문했던 방들에선 주인의 취향을 알아내기가 참 쉽지 않았다.

오직 찌들어 있는 담배 냄새로 남자 방, 냄새가 조금 덜하면 여자 방 정도일 거라 추측했으나 대부분은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고 세간은 빈약했으니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단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기야 지금에야 도대체 그 수많은 방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문득 궁금해진 것이지 당시에는 누가 방주인 인지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짐작컨데 방주인 역시 내가 자기 방을 방문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테고, 또 여전히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을 게다.

당시에는 다만 굳이 들어내 놓고 떠들기에 적당한 사안은 아니었던 정치, 역사,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히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빌려준 그 누구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해서 나와 내 동기들은 그저 서 너 시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고 나누기에 지치지 않을 요량으로 가져간 과자봉지 몇 개, 음료수 몇 캔 중 뜯지 않은 과자나 음료수는 방주인 혹은 주인들을 위한 감사의 표시로 남겨 두고 나오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좀 달랐다.

무엇보다 사정이 어려운 동기의 다음 학기 등록금 일부를 선배가 내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진행되는 첫 모임인 데다 다행히 늘 시간이 빠듯한 학기 중이 아니었다.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혈육 정도 되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모교 선배도 아니고 다른 학교 선배인 데다 본인 사정도 딱히 마땅치 않은 것을 이 눈치, 저 눈치로 이미 알고 있는데, 부러 공사판 일까지 자청해 후배를 챙겼으니 우선은 감사했고, 다음은 안쓰러웠다. 이제야 돌아보면 근사한 식사라도 함께 대접했어야 마땅하나 당시 우리 사정 또한 고만고만해 그런 감사 치레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고, 졸망졸망 해낸 생각이란 게 ‘세미나 전이나 후에 맛난 식사를 손수 지어 밥 한 끼 하자’ 정도였다. 서로 나눠 싸온 밑반찬을 내고 뭔가를 볶고 끓인 뒤, 없는 식기들을 총동원해 한 끼 식사를 차려냈고, 신문지 한 장을 척 깔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누가 무슨 음식을 만들었고 과연 먹을 만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맛이 별로였다 한 들 그 상황에서 타박할 인물도 없었고, 먹지 못 하겠다 투정할 인물도 없었다.


거창하게 ‘뜻’을 같이 했다기엔 창피하고,

백이면 백 다른 게 사람의 생각이라는데, 그래도 우리는 모조리 ‘같은 생각’을 가졌다기엔 억지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혈기는 왕성한데 세상은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고,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지 자꾸 헛갈리고,.

왕성하고 순박하며 아둔한 젊음 몇이 모여 세상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지각색 서로의 ‘생각’이 한 데로 맞춰지는 것 같고, 네 생각이 곧 내 생각이란 믿음이 굳어지면서부턴, 결국엔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들은 서로의 옆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까지 장착하게 된 사이.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옆을 지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며 꼭 그럴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건 몰랐다. 설령 누가 알려줬어도 그땐 감히 그런 불순한 생각은 할 수 없다고 부정했을 것이며,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다른 누구들 문제이지 우리 사이에 일어날 일은 아닐 거라 믿고 있었을 게다.


그저 후배를 위해 애써주는 선배가 많이 감사했고, 비밀스러운 세상 이치를 들춰내 알려주는 선배가 오직 진리요, 멘토였으며, 그 자리를 함께 지켜내고 있는 동기들이야 말로 형제만큼 진한 형제라 믿고 살았을 때였다.


그렇게 주인을 알 필요 없는, 모두가 주인인 자취 촌 쪽 방을 돌고 돌면서 그 시절 시간은 흘러갔고,

더 이상 자취 촌을 돌며 쪽 방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즈음, 우린 모두 서로에게서 독립해 살아 내야 할 시간을 문득 마주하게 됐다.

각자 공부를 더 계속하거나, 취직을 하기도 했고 혹은 이도 저도 아니게 지내기도 하면서 한 해, 두 해,.

세상에 부대끼며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하자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핑계가 가장 쉽고 편한 핑계란 걸 알아차렸고 동시에 서로서로 많이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도 했고, 하나 둘 아이도 가졌고, 또 누구는 이혼도 했다.


그러고도 한참.. 아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되자 간신히 십수 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흥에 달아 웃으며 그땐 그랬었지 깔깔깔이 아니라, 마치 작정을 하고 내리는 장마 비처럼.

누구든 시작만 해 봐라 벼르고 별렀던 것처럼.


그 시절 주인 모를 자취방에서 해 먹었던 밥 한 끼를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싶어 시작했던걸 텐데..

우리 식으로 찬란했던 그 시절, 그 젊었던 시절을 남들처럼 술 한 잔 걸치면서 좀 과장스럽게 자랑스러운 척, 뭐 그러고 싶었던 걸 텐데.. 중년이 다 돼서도 아둔했던 건지, 순박했던 건지 우린 서로에게 전혀 가볍질 못했다.


이제와 어쩌자고… 배신을 했네, 당했네..

해묵어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굳이 꺼내 매듭지으면 깔끔해질 거라 믿었던 걸까.

아니. 우린 모두 알면서도 작정을 한 거였다.

그때 그 시절처럼 살아오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래도 ‘자취 촌 쪽 방 우리’는 아니어도 괜찮으니 서로의 옆에 남아 세월을 같이 보내길 바래서.

그래서 작정을 하고 서로 외면한 이야기를 굳이 쑤셔내 대놓고 펼친 거였다.

그렇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우리 시절 이야기가 한바탕 몰아치듯 지나가고 우린 다시 요량 껏 살아내야 하는 삶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다 토해내고 나니 개운했던 걸까, 때론 마음껏 분주하게 서로를 찾기도 하고 달려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옆을 지켜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우린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너나 나나 별 거 아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듯했다.


그렇게 겨우 몇 년.

이제 좀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선배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싶을 그즈음,

하나밖에 없는 내 선배가 세상을 버렸다.

이제 좀 행복을 알 것 같다더니 무심하게 세상을 버렸다.

역시 마지막 가는 그 순간까지 힘든 누군가를 돕다가 아무런 암시 없이 그냥 세상을 뜬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서둘렀어야 했다.


고마움이건, 탓이건,. 뭐라도 서둘렀어야 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배.. 많이 그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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