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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뭇국과 가마솥 무밥

가족 이야기

by 명선우

내가 살던 대구 원대교 입구에는 양복점 거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성은라사’가 제일 큰 양복점이었다. 부모님과 직공 세 분, 우리 오 남매까지 모여 매 끼니 거하게 한 상 차려진 식사 시간은 동네에서도 유명했었다. 색색별로 그릇에 담아내는 손끝 야무진 엄마 덕에 우리 집 식사는 하루 중에도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시금치나물, 어묵볶음, 감자조림, 멸치볶음, 파래김과 양념장, 밥솥 밑바닥을 긁어 양푼 가득 노랗게 담긴 누룽지, 참기름 부어 살살 볶은 소고기 뭇국. 왁자지껄 웃음이 오고 갔던 다섯 살 적 식사 시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몸무게 2.3kg인 미숙아로 태어 입도 짧고 편식도 심한 나는 밥 먹을 때마다 야단맞는 게 일상이었다. 식구들은 식사를 마치고 고소하게 식어가는 누룽지를 먹을 요량으로 급히 숟가락질하고 있을 때, 사고뭉치 막내딸이 밥투정 끝에 징징대며 손가락 끝으로 누룽지 담긴 양푼을 가리켰다. “나 저거 먹을 거야!” 오빠와 언니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유괴 사건 이후 가족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막내딸의 선언은 언니, 오빠의 디저트를 빼앗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삭하고 알맞게 식은 누룽지 담긴 그릇에 물을 가득 붓고 숟가락을 펌프질 하듯 말아 ’ 물밥’을 만드는 대참사를 저질렀다. 물에 말아 축축해진 누룽지 물밥은 상상보다 맛이 없었고 숟가락질 3번 만의 “에이 맛없어”하며 그릇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 꼴을 보던 오빠는 고소한 누룽지에 물을 부은 분노를 담아 내 머리에 꿀밤을 날렸고 언니는 상다리 밑으로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난 아픔과 억울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겨우 걸음마를 떼고 밥을 먹기 시작한 2살 터울 남동생은 우는 나를 따라 영문 모르고 저도 같이 엉엉 울어댔다. 사고뭉치 딸내미 때문에 난리법석이던 식사 자리가 이제 와 생각하니 왜 그리 우스운지.

소고기뭇국이 나왔던 휴일 아침. 짭조름한 소금간이 된 무를 쪽쪽 빨아 식감 서걱대는 맹탕 무만 국그릇 옆으로 쓱 밀어놨다. 꼴 보기 싫은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드시던 수저로 내 손등을 '탁' 치셨다. 너무 놀라고 아팠지만 엄청 화가 나신 아버지 눈빛에 움찔하며 눈을 깔았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건데. 애들이 귀한 걸 몰라서 " 하시며 아버지 밥그릇으로 내가 쌓아둔 허옇고 투명해진 무를 가져가셨다. 김에 발라 드시려던 양념간장 한 숟갈을 넣고 밥과 무를 비비시더니 한입에 꿀꺽 삼키셨다. 혼잣말로 “ 옛날 맛이 안 나네.” 하신다. 옆에서 생선 가시를 발라내던 엄마는 “ 여 묵을 거 이래 천지구먼 또 그 무밥 타령을 하는가 “하며 서운해하셨다. “니는 모른다. 보리랑 네모나게 썬 무를 섞어가 가마솥에 푹 익혀서 간장에 비벼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 옛 생각나시는 듯 아련하게 말씀하셨다. 아픈 손등을 쓰다듬으며 이야길 듣다 ”맛이 한 개도 없으실까 같은데요? “라며 한마디 거들었다가 아버지한테도 꿀밤을 맞았다. 밉상도 그런 밉상이 없었다. 아버지가 늘 그 맛이 안 난다며 그리워하셨던 ‘가마솥 무밥’은 어떤 맛이었을까?

아버지는 19살 적 독사에게 물려 다리 한쪽이 장애가 되기 전까지 충청도 청량에선 인물 좋고 건장하다고 소문난 청년이셨단다. 어딜 가나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보던 동네 아가씨를 설레게 한 잘생긴 청년. 어쩌면 가마솥 무밥은 아버지의 황금 같던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의 맛이지 않았을까? 두 발로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던 고향 풍경을 저장한 타임캡슐이 아니었을까? 또 아픈 손 등을 쓰다듬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신은 자라면서 귀하게 먹었던 음식의 소중함을 모르고 짭조름한 것만 가려먹는 막내딸을 괘씸하게 보셨을까? 아니면 다시는 못 먹을까 허겁지겁 먹으시던 젊었을 적 식사 대신 제 입맛에 맞는 짭조름한 맛만 쪽쪽 빨아먹고 무는 버리는 딸의 풍요로움에 안도하셨을까?

​내 아들이 5살 적,

친구가 놀러 왔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갔다.

이모가 맛있는 거 다 사줄 테니 먹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와봐! 라며 아들에게 말하니 아들은 저만치 슈퍼 안을 한 바퀴 돌아 '모리나가 캐러멜' 하나를 집어왔다. “이모가 다 사준다니까? 더 가지고 와” 다시 한번 아들에게 주문했지만 아들은” 지금은 이게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캐러멜 하나만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때 난 안도했다. 다시는 먹지 못할까 봐 국물에서 고기를 걷어 허겁지겁 먹지 않고, 다시는 가질 수 없을까 봐 자기 몸보다 더 많은 과자를 탐내는 아들이 아니라 지금 그 아이가 필요한 것이 캐러멜 하나라는 것이, 그렇게 부족함이 없이 키웠다는 것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혹시 아버지도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의 편식을 보며 나와 같은 안도를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뒷모습이 생각난다. 입에 시침 핀을 물고 손님 옷을 가봉하시거나, 큰 재단 가위로 본뜬 천 위를 가르며 가위질하고 계셨다. 동네 아이들이 부잣집 딸인 나를 시샘하여 의족을 하신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걸음이 흉내를 냈다. “너희 아버지 고무 다리지? 고·무. 다. 리“라고 놀렸고 난 울면서 달려와 아버지 바지춤을 매달려 고자질해도 반응도 없이 묵묵히 일만 하셨다. 엄마가 가끔 부부싸움을 하시고 우리를 버리고 도망갈 거라고 협박했다. 우린 엄마 다리에 매달려 울고불고해도 아버지는 등만 보이고 일만 하셨다. 일하던 아저씨가 옷감 몇 필을 몰래 갖고 야반도주를 치는 사고를 쳐도, 집안 대소사가 아니시면 늘 등만 보이고 일을 하셨다. 이제 와 생각하니 가정의 일에 무심하셔서 그런 게 아니시라 모든 것들이 다 뒤집히고 요동쳐도 오직 ‘일’을 하시며 가장의 자리, 중심을 잡고 계셨다는 깨달음도 올라온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아버지 등의 미묘한 떨림도 생각이 난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힘겨울 때, 등 위로 흐르던 미세한 떨림들. 그게 한숨이고 눈물이었으리라. 세월이 흘러 내 나이 마흔다섯. 아버지가 지병으로 한참을 앓을 무렵, 아버지가 어서 돌아가시길 바랐던 적도 있다. 병원 수술비와 간병비, 생활비를 분담하다 가족들 관계가 붕괴되어갔다. 내 근본이 되시고 참고 인내하며 성실하게 사는 인성을 물려주신 아버지를 돈이 버거워 얼른 돌아가시길 바랐던 불효가 글을 쓰는 이 순간, 가슴을 후벼 파고 지나간다. 그까짓 돈이 뭐라고.

아버지 생각에 이르러 문득 냉장고에 있던 무 하나가 생각이 났다. 야채칸을 열고 무를 꺼내 한 입 베어 먹으니 제법 알싸하게 매운 향이 코를 찌른다. 순간 매운 향 때문에 눈물이 훅 쏟아졌다. 매운 향 때문인지 찔끔 나온 눈물을 핑계 삼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어본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늘 그 맛이 안 난다는 추억의 가마솥 무밥 잘 드시고 계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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