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순례길과 다시 떠나는 다섯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일주일쯤 지나자 어느 정도 루틴이라는 게 생겼다.
6시쯤 기상해서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전날 싸놓은 배낭을 가지고 나와서 재점검한 뒤 신발을 고쳐 신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알베르게 (순례자민박)를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남편과 나는 오늘도 힘을 내어보겠다는 다짐으로 씩씩하게
한 발씩 내디디면서 걷는다. 이른 아침이라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 주민들은 아직 잠들어 있고 동네 골목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간혹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들과 이른 아침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빵집이나 카페의 따뜻한 불빛만이 인기척을 느끼게 했다.
15km쯤 걷다 보면 어느새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듯이 뜨겁고 아프다. 중간에 몇 번씩 앉아서 쉬어도 오래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피로가 쉽게 풀어지거나 하지 않고 계속 아픈 채로 숙소까지 갈 수밖에 없다.
하루에 적게는 15km, 많게는 30km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야 하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도 누구에게 아프다고 호소할 수도 없고 투정 부릴 수도 없다. 본인이 선택한 순례길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 앞에서 걸어가다가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자꾸 돌아보는 남편의 행동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시작했으며 따로 숙소까지 걷자고 했음에도 신경이 쓰이는지 꼭 같이 걸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폭이 맞지 않았고 가끔 쉴 때 나는 퍼질러 앉아서 편히 쉬었지만 남편은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힘들다며 내가 일어날 때까지 서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걷다가 힘든 날은 중간에 진통제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작은 마을이라도 가게 되면 카페로 들어가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자주 쉬곤 했으나 남편은 어느 순간 이러한 나의 루틴에 대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순례길은 천천히 나의 체력에 맞게 걷고 남들처럼 굳이 일찍 가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길인데 나와 남편은 걷는 것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걷는 동안 풍경도 보고 아픈 다리도 쉬어가며 때로는 맛있는 음식도 즐기면서 오늘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출발했으니 부지런히 걸어서 최대한 빨리 숙소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편히 쉬는 게 더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순례길을 걷다가 길 중간에 서서 다투기 시작했다.
" 아니, 자기가 걷고 싶다고 해놓고 매일 그렇게 힘들다고 짜증 내고 계속 중간에 쉬고 게다가 나오는 카페마다 다 들르면 언제 숙소에 도착하냐고? "
" 숙소 예약도 다 되어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길을 재촉해? 천천히 풍경도 보고 생각도 하면서 걸으려고 순례길을 선택한 건데 그렇게 빨리 걷기만 할 거면 뭐 하러 순례길 따라온 거야? 그리고 내가 체력도 안되고 힘들어서 좀 쉬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그거 하나 못 맞춰줘? 그리고 나는 아침을 먹어야 기운이 나는데 왜 매일 아침마다 커피 마시는 걸 보면서 짜증을 내냐고? "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서 한바탕 다투어도 창피하지는 않았지만 말다툼 이후 남편은 나를 길 위에 내버려 둔 채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속도대로 천천히 걸었다.
가족이 우선이고 나를 많이 배려해 주는 남편이지만 우리는 길 위에서 서로 많이 다름을 알았다.
순례길을 걷는다는 것에 대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걷지 않았음을 금방 알게 되었고 길 위에는 둘 밖에 없음에도 서로가 편하게 소통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일방적인 배려를 남편에게 요구했고 남편은 책임감이라는 틀에 갇혀 처음 순례길을 걷고자 했던 마음이 아닌 오로지 오늘 잘 수 있는 숙소에 도착하는 것에만 충실했다.
일상의 번잡함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그리고 제대로 휴식을 갖지 못했기에 선택한 우리의 순례길은 어느새 한국에서 하던 생활처럼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목적을 위해서만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원한 아침 공기와 수확 끝난 황토의 밀밭과 티끌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을 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연과 여행이 주는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우리가 온전히 한국에서의 모습을 떨쳐버리지 못했음을 순례길 걷는 중에 알게 되었다. 남편의 배려를 당연시 받아들이고 당장의 나의 기분과 몸 상태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끝없이 남편에게 희생을 요구한 나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처음으로 떨어져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내가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배려와 사랑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았다. 부부라고 해서 같이 출발하고 도착할 필요는 없었는데 각자의 속도를 무시하고 서로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가끔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지 않으며 혼자만의 시간도 서로 존중할 줄 알고 부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서로의 적당한 거리를 침범하지 않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 걷는 동안 우리는 한참을 더 겪고 부딪히면서 성장해야 하는 두 사람인 것이다.
# 오 세브레이로에서의 순례길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