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거절하지 않는 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해 동안 나는 자연에 이끌렸다.
정원은 아니고 바다였다.
아버지의 고향 근처 남부 해안,
크고 작은 배가 바쁘게 오가는 솔런트해협에 아버지 유해를 뿌렸지만,
내가 위안을 찾은 곳은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노퍽 북부의 길고 한적한 해변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긴 수평선을 본 적이 없었다.
그곳은 세상의 끝 같아서, 아버지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듯했다.
-수 스튜어트 스미스 정원의 쓸모 중-
정원의 쓸모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상실의 슬픔을 길고 한적한 해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연은 인간의 감정에 무감각하지만,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은 우리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전염되지 않는 특징 덕분에 상실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일종의 위안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고된 하루를 보내고 TV 리모컨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지친 마음이 쉴 곳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리모컨은 머무를 화면을 정하지 못한 채 "틱,틱,틱"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 그렇게 돌아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돌아대는 소리가 그칩니다.
남편이 쉴 곳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화면에서는 깊은 산속 약초를 캐는 50~60대의 아저씨와 개그맨 이승윤 님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방송은 시사교양 프로그램 중 수요일 종편 프로그램 시청률 최상위권을 자랑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입니다.
좀 나중에야 알았지만, 남편은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관심이 없었던 터라 남편이 왜 이렇게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보니 저희 부모님도 '나는 자연인이다'의 애청자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뭔데 다들 이렇게 좋아할까?' 궁금해져 하루는 남편 옆에 앉아 같이 보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른 산이요, 나무요, 흙이었습니다. 밤에는 풀벌레 소리와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습니다. 모두 자연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분들도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습니다.
남편은 섬에서 태어나 자연을 벗 삼아 자랐지만, 일을 찾아 서울로 연고를 옮기며 도시인이 다 되었습니다. 그는 화면 속 자연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며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듯했습니다. 숨 막히게 돌아가는 복잡한 직장인의 삶은 겨울과 같이 거칠고 시린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를 감싸주었던 자연이 주는 쉼을 화면을 대신해 찾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를 거절하지 않는 자연의 품을 그리며 사는 듯합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그림움만 쌓여가지 않기를.
힘들고 아픈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사람을 만나도 내 감정을 온전히 공감받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충고나 조언으로 아픈 감정을 깊이 거절당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나 수 스튜어트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자연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기에 오롯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대신 집 앞 성복천(星福川)을 따라 걸어봅니다.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제게 넉넉한 품이 되어 줍니다. 나무 가지에 달린 푸른 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알아채주기도 하고 문득 제 자신에게 말을 건네 보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부는 바람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 내가 저 잎들처럼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걸음을 걸으며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그리고 이내 주변을 다시 둘러봅니다. 작은 물길 위로 물이 흐르는 소리에 집중해 보면, 내 마음에 맴돌던 온갖 잡스러운 감정들도 함께 휩쓸려 내려가곤 합니다.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무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듯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아니어도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생각보다 이렇게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가을이 짙은 밤이면 코끝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어 깊은숨을 내쉬도록 해줍니다. 머릿속 깊은 곳까지 청아한 가을바람의 시원한 향기가 깃듭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도 상처로부터 개운해집니다.
이러한 제 경험은 단순히 주관적인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연 속에 머무르거나 숲에서 걷는 것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라 불리는 코르티솔 수치가 15%에서 최대 25%까지 감소한다는 유의미한 연구 결과로도 보고가 되고 있으니까요. 자연의 바람과 소리는 우리의 아픈 부분을 그렇게 토닥이며 회복이 깃들게 하는 모양입니다.
김재진 시인의 <토닥토닥>이 떠오르는 밤입니다.
토닥토닥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 너는 나를 토닥거린다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 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
너는 자꾸 토닥거린다 나도 자꾸 토닥거린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토닥거리다가 잠든다
— 김재진,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