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의 변질이 불러온 겨울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by 겨울나기 이코치

원효대사와 해골물


국민학교 도덕시간에 배운 원효대사의 일화는

어린 제게 세상 살이에 마음의 이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 준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입니다. 이후 초등학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지요.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동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잠결에 목이 너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 깨어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간 구역질이 났지만, 원효대사는 이 경험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밤에는 물이라고 생각했기에 달게 느껴졌고, 아침에는 해골물인 것을 알자 더럽게 느껴진 것일 뿐, 물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현상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세상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니, 굳이 당나라까지 가서 배울 필요가 없다"라며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중생 교화에 힘썼다고 합니다.


물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으나 사람의 마음이 생각과 반응을 만들어 낸다는 깨달음.

이는 이 시대의 현상들이 우리 마음에서 기인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 입니다.



학업의 변질이 가져온 겨울


너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다가 지쳐 쓰러진 사람들은 그 힘든 순간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일어난다 해도, 또다시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지금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것을 안다고요.


얼마 전 코칭을 통해 만났던 장애 학생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다들 제가 그동안 잘 해왔으니 '또 잘 해낼 거라고, 넌 이겨낼 거야'라고 했어요.” 그 말이 저를 위로하고 싶어 해 준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오히려 저를 더 무겁게 짓눌렀어요.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데 또다시 잘 해내고 이겨내야 하는 거구나. 나는 정말이지 더 이상 힘이 없는데.'라는 생각에 절망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어린 시절부터 꽤나 공부를 잘해왔고, 자신이 가진 장애에 대한 편견없이 부모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학원비를 지원해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주도 학습으로 성적을 올려왔습니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어느새 친인척들 사이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고 합니다. 학업에 대한 간절함으로 시험이 다가오면 하루 10분도 아까워하며 악착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성적과 받아오는 상장에 다들 감탄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좋았지만, 이내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집중되는 기대와 칭찬이 큰 부담과 압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에 '너는 잘 해내야만 해'라는 생각이 깊이 각인된 채 지금껏 살아왔다고 합니다.


쉴 줄 모르고 달리기만 하던 학생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4학년 때 결국 멈춰 서고야 말았습니다. 특별한 일이나, 계기가 있던 것이 아닌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난 학생은 부모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사춘기 시절도 걱정하시지 않게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살 줄 아는 진짜 능력을 지닌 학생이었지요. 다만, 지금은 쉬어가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모습이 제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제 기준이 아닌, 학생 입장에서의 진정한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껏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다. 쉬어가도 된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코칭이 진행될 때 학생이 제게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너무 울컥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고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코치님뿐이었다면서, 역설적이게도 그 말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차가 빨리 달린다 해도 연료가 다하면 멈춰 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에너지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지치게 되면 잠시 멈춰 서서 쉬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잠시 멈춰 선 사람들을 향해 '달려야 한다'라고 다그치지 않기로 해요. 그럴 때는 내 기준의 공감이 담긴 말보다는 그저 묵묵히 기다려 주는 인내가 더 나은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 학벌의 정점인 서울대학교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2024년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생이 겪는 고민 1위는 우울, 불안,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교내 상담기관을 찾은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최고를 달렸던 학생들이 서울대라는 문턱에 들어서면서 스스로가 최고가 아님을 경험해야 하는 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좌절을 겪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일부 학생들은 "'최고라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라는 상담사의 말을 부정하기도 한다"라고 합니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우리 어른들이 길들여 놓은 신념이 얼마나 그들을 아프게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본디 학업은 즐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교 경전인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는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풀이처럼, 배움(學)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는 기쁨이라고 강조합니다. 학업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우리의 마음이 학업을 '최고여야 가치 있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변질시켜 결국 우리의 아이들을 차디찬 겨울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시인의 위로입니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 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학업의 변질이 결국 우리의 아이들을 겨울의 늪으로 밀어 넣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 지쳐 쓰러져버렸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세상의 모든 현상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처럼, 학업의 변질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혹독한 겨울의 대가는 다름 아닌 우리 아이들이 견뎌내고 있는 것이지요.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도 겪어내는 우리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조금씩 부족한 것은 고쳐나갈 줄 아는 마음으로 작은 성공에도 함께 기뻐하며 더 나은 발전을 위해 격려하는, 학업의 진짜 즐거움을 되찾는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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