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닥친다'

by 겨울나기 이코치

인생은 많은 시간의 점들이 연결되어 선을 이룹니다. 어떤 점은 눈에 띄게 굵게, 어떤 점은 희미하게 새겨지기도 하지만, 여하튼 시간 속 경험의 일들은 선을 이루어 내 인생을 하나의 그래프처럼 그려 나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어떤 이도 일직선의 그래프를 그리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에게 굴곡이 존재하기에 인생이지 싶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 새겨진 점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점들을 나만의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저 멀리의 점들이 뒷발목을 잡아 오늘에까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점들은 이제는 연결된 선의 흐름에 흘려보내어 흐려지기도 합니다.


겨울을 나는 이들 중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라며 삶에서 기존 중력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급작스럽게 쳐들어오는 경우의 이야기를 종종합니다.


예상할 수 없는, 대비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겪는 재난과 같은 경험들은 나를 얼어붙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느닷없이 '닥친다'는 점에서, 있는 것을 '쓸어간다'는 점에서, 이전과 이후의 삶의 풍경과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내가 당한 사건이 삶의 자연재해라는 말은 적합해 보입니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인생에서 만나는 겨울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은유 작가님의 표현을 통해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이 자연재해처럼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닥치고 또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메아리 같은 질문에 매번 답을 구하며, 어떤 날은 "그래도 살자"고, 어떤 날은 "살아서 무엇하느냐"고 생각의 고랑을 파고듭니다.


그래서 저는 쓰고 또 썼던 것 같습니다.


내 고통의 바닥과 그럼에도 숨 쉴 틈바구니를 찾기 위해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이었던 글쓰기.


처음엔 제 안에 언어들이 힘을 잃고 종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닥에 새겨진 공허한 나의 언어들은 어떤 힘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 날들이 쌓여가며 언제라고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끄적였던 푸념에 가까웠던 말들이 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했고, 어떤 날은 외로운 나를 힘껏 안아 토닥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글들은 눈물에 젖어 흐려지기도 했지만, 그 흔적에 "그럼에도 또 살아냈구나"라는 자기 격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밥을 짓는다, 농사를 짓는다처럼 글을 짓는다고 합니다.


왜 '짓는다'고 할까요?


"짓다"라는 말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노력과 정성을 들여 새로운 것을 일으키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끄적여왔던 종이 위의 널브러짐은 제 마음에 집을 지었습니다. 글쓰기는 내면의 뿌리를 내리고 생명이 움트는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새해가 옵니다. 겨울을 나는 이들과 새해에는 종이 위에 글들이 널브러지더라도 함께 끄적이는 일들을 만들어, 그들의 삶에도 나를 살게 하는 언어의 집을 함께지어 새로운 터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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