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까마득한 초등학생 시절, 잼민이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숙제가 하나 있었다. 무려 공장 견학해 보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삼삼오오 모여 지역 내 공장을 견학해 보고 보고서로 제출해야 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때 인근 동네에 큰 가공품 제조공장이 있었는데 반 친구들 대부분이 함께 그곳을 견학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잼민이는 크게 좌절하고 말았다.
서러움에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훌쩍훌쩍 거리는 찌질한 딸내미의 모습을 본 엄마는 그날 근처에 있는 공장에 쭉 전화를 돌려서 작은 두부공장에 방문허가를 받았다. 정말이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건 큰 통에 담긴 몽글몽글 하얀 두부 때문도 아니요, 애 셋을 끌고 생전 처음 보는 공장에 연락해 불쑥 찾아가 이모저모를 직접 견학시킨 당찬 젊은 날의 엄마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애만 혼나쨔냐아!
그녀의 패기를 가장 쏙 빼닮은 딸내미는 무럭무럭 커서 (역시나 엄마를 닮아) 술꾼도시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또 (이 역시...) 입맛이 매우 까다로웠는데, 부산까지 가서 나름 '단골술집'의 로망을 이루어보겠다며 매서운 미각으로 이집저집 열심히 먹고 마셔재낀 결과 얼마 만에 마음에 드는 술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사장님께 부산 지역 전통주라는 '우리술 이바구'(* 이바구: 이야기의 부산 사투리)를 추천받아 한 모금 마신 그 순간, 꼴깍, 그녀는 직감했다. 어쩐지 이 술에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마음에 들었던 해운대 미포 '수블' 추천합니데이!
이윽고 어린 초딩의 손을 잡고 도심 속 두부공장을 찾아간 그녀의 엄마의 뒤를 따라 '우리술 이바구'를 만드는 도심 속 '가마뫼 양조장'을 직접 찾아가보게 되는데...!!(얼쑤!)
서두가 길었지만 실화다. 단골(이 된) 술집에서 이름도 생소한 오양주라는 '우리술 이바구'를 마신 순간 시큼하지만 과하지 않은 기분 좋은 단맛에 그 이름을 머릿속에 담아두었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기억이 소환되어 구매처를 찾아보다 보니 이 술이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가마뫼 양조장'(혹은 전통주 상점)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지역 전통주라는 거다. 휴대폰만 있으면 뭐든지 새벽같이 배송받는 요즘 같은 때에 온라인 판매를 하지 않아 직접 가져가야 하는 술이라니, 더욱 구미가 당겨 양조장에 전화를 했다.
- 사장님 혹시 아무 때나 술을 구매할 수 있나요?
- 아니지예. 저도 일정이 있어서... 근데 맻병이나 사실라꼬?
- 저 혼자 먹게 세 병만 사려고요!
- 아 혼자예? 세 병이면 뭐 두고두고 마시고, 맞다숙성하면 더 맛조아예 1년도 갑니더
- 아뇨 올해 안에 다 마실 거 같은데요
- (ㅋㅋㅋㅋㅋㅋㅋㅋ)..흠흠... 연락 함 주고 오이소
수화기 너머 빵 터지는 사장님의 허락을 받고 다음날 양조장 방문을 허락받았다. 찾아보니 이곳은 좌천동 지역주민이 힘을 모아 만든 작은 마을기업이란다. 좌천동 주민들이 함께 만드는 작은 양조장이다 보니, 매장에 상주할 수 없어 사전에 연락을 주고 방문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어쩐지 더욱 프라이빗한 느낌,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양조장을 찾았다.
산복도로를 보면 아 부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날 좋은 날 찾은 가마뫼나들목(양조장)
동구 좌천동 산복도로를 굽이굽이 따라 달리다 보면 한쪽에는 세월이 물씬 느껴지는 작은 건물들이 아슬아슬 모여있고, 그 틈으로 좁다란 계단이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고 있다. 다니는 차보다 지팡이 수가 더 많은 것만 같은 산복도로 중턱을 따라가다 보니 여기인가 싶은 평범한 외관의 양조장, '가마뫼나들목'이 나온다.
전화로 요청드린 세 병을 들고 룰루랄라 나오니 아주머니가 따라 나오셨다. 냉장보관만 잘하면 두고 마셔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어머니 걱정 마시라고 곰방 마시고 또 사러 오겠다고 너스레를 떨자 아주머니께서 웃으며 들어가셨다. 문을 걸어 잠 구는 걸 보니 아마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시는 동네 주민인 듯하였다.
병사진은 부끄러워서 집에 오자마자 찍어보았다ㅋㅋ
오양주가 무엇인고 하니 첫술에 덧술을 입혀 발효시키는 작업을 5번 반복하는, 말 그대로 다섯 번 숙성시킨 술이라고 한다. 국내산 찹쌀, 맵쌀, 진주 앉은뱅이밀 누룩과 물로만 만들어서 그런지 맛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첫 입은 상콤하니 산미가 올라오는데 신맛이 아닌 기분 좋은 산미라서 과일의 느낌이 살짝 맴돈다. 대신 향료가 들어가지 않아 쌀로만 낸 발효주의 산미에 가깝다(왜, 해창막걸리의 산미도 청포도의 향이 나지 않던가!) 와인처럼 호로록 음미하며 마시면 달큰한 맛이 따라온다. 본인은 단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단 맛이었다. 식전주로도 좋지만 부침개나 튀김같은 기름진 우리 요리에도 제법 어울렸다. 도수는 15도, 참이슬 후레시보다 아주 조금 순한 정도. 감미료 없는 술이라 다음 날 숙취도 얼마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단순한 재료가 긴 숙성기간(1년)을 만나 기교 없이 깔끔하고도 깊은 맛을 만들어냈다. 맛있다, 이 술!
더 할 나위 없이 맛있다, yes!
귀한 부산 술 세 병을 쟁여두고 귀한 손님을 만날 때 한 병씩 꺼내올 생각을 하니 제법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다 그 옛날 엄마 손 잡고 찾았던 두부공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와 멀지 않은 뜻밖의 장소에 위치한 도심 속 작은 공장의 문을 열자 뿜어져 나오던 온기와 따뜻한 김, 커다란 통 속에 담긴 몽글몽글 하얀 두부 덩어리. 친구들과 공장 견학에 함께하지 못한 서러움에 찔찔거리던 소심쟁이 초딩은 무럭무럭 자라 부산이라는 타지에 있는 도심 속 작은 양조장도 혼자 문 두드리는 씩씩한 어른이가 되었다!
- 엄마, 나 이렇게 잘 컸어! 그리고 여기 맛있는 술 세 병 샀어! 직접 마셔보고 양조장 찾아가서 사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