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렇게 하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건가요?

by 씀씀

[전 편에서 이어짐]


| 스트레스도 '만병의 근원' 타이틀을 내줘야 할 때가 됐나. 하기사 오래 해 먹긴 했지. 원래 위협적인 도전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 마침 적임자도 나타났겠다, 지금이야말로 세대교체를 할 적기리라. 어디 그럼 긴장감 조성한답시고 60초 후에 공개하고 그럴 것 없이, 바로 새 챔피언 한 번 소개해봐?


"최강 인지도와 막강 파괴력의 '스트레스'를 제치고 만병의 근원! 그 왕좌를 차지한 루키는 바로?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미간이 찌푸려지는 이름, 큰 엄마 되시겠습니다!"




역시 인생은 살아볼 일이었다. 내가 우리 엄마도 아닌 남의 엄마... 도 아닌 남의 큰 엄마 때문에 이렇게 골골댈 줄 누가 알았을까.


내 인생 최강 빌런답게 큰엄마 후유증은 대단했다. 마상에 자존감 떡락, 지병인 불면증 악화와 그게 무어든 기승전큰엄마로 완성되는 의식의 흐름까지. 그 어른은 숙면하셨을 듯한 그 밤부터 나는 내리 사흘을 꼴딱 샜고 매일 좀비처럼 출근했다.


나와 큰엄마의 만남을 그날 밤에야 안 남자 친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날 만나고 돌아간 큰엄마에게 밤늦게까지 시달렸고 다음 날 출근 때는 이런 얘길 들었단다.


"열흘 준다. 내 말대로 다 하면서 그 결혼 할 지 생각해봐. 하겠다 그럼 두 달 안에 시킬 거야. 어디 니 월급으로 살아봐라. 살 수 있나"


흠... 이쯤 되면 가장 오싹한 장르는 공포도 스릴러도 아닌 현실 아닐까. 못된 걸로 모자라 악랄했다. 인간 근본은 성선설이라는, 몇 안 되는 내 믿음 중 하나가 흔들렸다.


누굴 싫어하고 말고는 개인 선택이고 취향이니 날 반대하는 큰엄마 결정 존중하는 바지만, 그 표현 방식과 뜻을 이루려는 방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된 게 본인 생각을 관철시키는 일에 1인칭보다 2인칭을 더 많이 썼다. 너는 이래서 안 되고 너가 그게 문제고... 시작과 끝이 나에게 머무는 화법, 가스 라이팅.


그래서 더 나쁜 어른이었다. 거절 당했다는 것만 해도 평생 갈 상천데, 어떻게 거기에 소금도 아닌 염전을 통째로 부을 수 있지? 나는 뭐 할 줄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아나?


(↓..... 줄 알아서 가만 안 있는 중...)

"어머님 아 아니지. 낳길 했어 기르길 했어 어머님은 무슨. 저희 이렇게 갈라놓으시면 저희보다 어르신이 힘드세요. 안 그래도 외로웠을 인생, 노년까지 쓸쓸하려고 그러세요? 이러다 오빠 집이라도 나가면 어쩌시게요? 인생에 비하면 사랑 그깟 거 순간인 거 알아요. 근데 사랑은 짧을지 몰라도 후회는 아닌 거 아시죠? 그럼 혹시 후회보다 긴 게 뭔지 아세요? 원망이요. 오빠 인생에 남은 원망은 이제 다 어머님 몫이겠네요. 남은 생 양아들 사랑 말고 원망 받으면서 불행하게 사시는 게 원이시라면 어쩌겠어요. 그렇게 하셔야지"




어른스러운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반대를 하더라도 조금만 무게 있게, 약간의 품격만 갖춰주시지 하는 마음. 그랬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상처 받고 세 사람 모두 이렇게나 시달릴 일은 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나친 미움은 때론 상대 아닌 스스로를 더 축내고 흉하게 만드는 법이기에 안타깝고 아쉬웠다.


정리해보면 그 어른의 최후통첩은, 내 인생을 담보 잡히면 결혼이란 대출을 해주겠단 거였다. 근데 암만 네 인생을 잡아놔도 사주며 형제 관계며 온통 성에 안 차니, 빡센 시집살이로 이자까지 받겠다는 막말을 허락인양, 것도 당신이 어른이시니 선심 쓰겠단 식으로 한 것.


삼재도 끝났고 아홉수도 지났는데 나한테 무슨 액운이 들었길래... 말도 안 되는 일을 이해하려고 들었더니 머리가 깨질 듯했다. 딜을 걸어오니, 일단 살펴보기라도 하자.


1. 친정에 1년에 4번만 가기:
미쳤니 X
2. 회사 그만 두기: 돌았군 X
3. 시댁에서 살기: 돌은 척하지 뭐 O
4. 살림 혼자 다 하기:
봉사한다 생각하고 O
5. 차 팔기: 그 차 나도 싫어 O
6. 오빠 월급으로 생활하기:
나도 돈이 있다 O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친건지, 까짓 거 악으로 깡으로 해보겠는 게 반이 넘었다. "이렇게 네 개는 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말에 남자 친구는 몇 번이나 되물으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기쁨보단 미안함과 기막힘에 의한 베베 꼬임이었을 것이다.


그래 감동 안 먹으면 인간이냐. 맘 같아선 온갖 생색을 다 내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짓. 생색도 희망이 동반돼야 모양이 나는 건데, 여섯 개 몽땅을 요구한 큰엄마와 네 개만 하겠다는 나의 팽팽한 대립 속에 희망 무슨.


만나기라도 해야 고성이든 극적 합의든 오갈 테지만, 큰엄마는 다시 협상 테이블 앞에 앉을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미 벼랑 끝까지 몰린 내가 더 이상을 희생하기도 어려웠다. 왜냐면 여직 이 남자를 못 놓고 있는 이 모지리에게도 지켜야 할 자존심! 꿈꾸는 미래! 절대 가슴에 대못 박아선 안 될, 부모님이 있으니까.




시 남자 친구가 나설 차례였다. 미션은 내가 하겠단 4개 주고, 못 하겠단 2개를 없던 일로 받아오는 것. 가짓수로 보면 내가 손해 보는 장사였으니 얼추 될 것도 같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칠 일인 게 분명했다. 귀는 막고 입만 여는 걸로 대화를 하는 사람과 어떤 소통을 할 수 있겠는가.


역시나 열흘은 소득 없이 지났다. 예상대로 비협조적인 큰엄마 덕분에, 남자 친구의 대화 시도는 무시당하거나 일방적인 샤우팅 속에 끝나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전진하자니 그러고 살 용기가 안 났고 후퇴하자니 이 사람 없이 살 엄두가 안 났다.


그 와중에 재밌는 건 큰엄마의 태도였다. 집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오만 눈치 다 보는 쭈구리로 살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달리, 큰엄마는 남자 친구를 각별히 챙기고 있었다. (결혼 관련 얘기를 시도할 때는 철저히 제외)


아침은 먹었어? 아까 셔츠에 음식 튄 건 어떡해. 얼른 세탁소에 맡겨" 물을 때면 응 걱정하지 마 정도의 시원찮은 답이 오길래, 한 번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뭐 해주셨는데? 오빠 일찍 나가잖아 근데도 차려주셔? 옷은? 지워졌어? 취조를 한 끝에 아침마다 보양식, 특별식, 몇 첩 반상으로 솜씨를 뽐내고 계시는 것과 옷들은 벗어놓기 무섭게 뽀송뽀송해져 개켜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드라마에서 봐 온 흰 끈으로 머리 싸매고 앓아눕는 어른들과는 그 방법과 수준이, 진정 달랐다.




10일째 날, 퇴근하고 큰엄마와 얘기하기로 했다던 남자 친구에게 연락이 온 건 자정이 다 돼서였다. 극적인 합의 같은 건 시나. 오히려 더 골치 아픈 고도의 심리전이 시작돼 있었다.


"다른 건 본인이 다 포기하셔도 너 일 그만두는 거랑 여기 들어와 사는 거 두 개는 절대 못 포기한대"


얼핏 보면 협상에 적극 임하며 많은 희생을 하는 듯 하지만, 좀만 생각해 보면 하나도 포기한 게 없었다. 그냥 널브러진 말들만 정리해논 셈. 친정 얘긴 누가 봐도 본인이 욕먹을 테니 없던 걸로 하는 거고, 차는 어차피 차 사준 돈 나더러 갖고 오라 했으니 퉁쳐지는 거고 살림 혼자 하기로 한 건 본인이 안 도와주면 그만. 오빠 월급으로 살림하는 것도 본인 말곤 돈 나올 데가 없단 거 아 테니까.


결론은 같았다. 나더러 일 그만두고 친구고 뭐고 하나 없는 동네로 와서 고된 시집살이 하며 남편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재미도 발전도 없는 인생 살아라.


순간 백기.. 백기 어딨어? 와 진짜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으로 들 건, 더는 못 하겠다는 남자 친구의 목소리였다.


... 그 어른 아닌, 그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큰엄마의 열흘이 이렇게 또, 유의미했다.


[다음 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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