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라리 돈봉투를 주시면 헤어져 드릴게요

by 씀씀

[전 편에서 이어짐]


| 밤 9시. 기를 다 뺏긴 채 집에 왔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이 이런 건가 싶게 다시 본 내 모습엔 생기가 없었다. 하기사,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던가.


참을 인을 서른 번은 족히 썼을 세 시간 동안, 얼굴에 뭔가 냅다 부어지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아쉬웠다. 차라리 그렇게 한 잔 흠뻑 맞고 엉망이 되는 게 훨씬 깔끔했을 텐데. 그랬음, 모르고 보기엔 주말 저녁 차 한 잔 마시는 게 다였을 평범한 그림에서, 사실은 내가 심장이며 뇌를 테이블에 내논 채 흠씬 짓밟히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인사를 한 내가 처음 들은 말은 사과였다. 아깐 심하게 말해 미안했다. 나도 이렇게까진 안 할라 했지. 그러길래 건드리긴 왜 건드려. 아가씨가 이해해라.


아가씨. 그게 큰엄마가 내게 한 가장 고운 표현이었다. 내 이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한 번을 이름 붙여 뭐뭐씨라 부르질 않고 아가씨라고만 하는 그 목소리가 어찌나 삭막하던지. 차라리 내 이름이 '아가'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는 세상 배부른 소리. 사과 뒤에 이어진 말에 아가씨가 얼마나 따뜻한 말이었는지 빛의 속도로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얼굴부터 복이 없어서 안 되겠다. 가난하게 살 게 보여"


오, 뭐지 이 신선함은? 사과 뒤에 어떻게 저런 공격을 할 수 있지? 거기다 아가씨에서 순간에 너가 되는 이 급격한 신분하락은 뭐며, 나에 대한 저 저렴한 평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 아빠가 당신들 좋은 것만 물려주신 덕에 뭘 해도 태가 난다는 소리를 더 듣고 사는 나한테 뭐? 얼굴부터 복이 없다고? 일종의 질투인 건가?


온갖 걸 다 예상했어도 이런 류의 막말은 전혀 생각 못 한 터라 순간 얼얼했지만, 이제 시작일 텐데 정신줄을 놓을 순 없었다. 나도 준비해야지! 자, 저 가드 올렸어요. 지금까진 어머님 자식 된 사람한테만 쏟아붓느라 성에 안 차셨을 텐데, 어디 남의 새끼한테 맘껏 해보세요. 당신 앞에선 절대 안 울 거니까 염려일랑 마시고요.




3시간 동안 계속된 큰엄마의 독무대, 나는 어디에도 없을 훌륭한 관객이었다. 삿대질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도 나 죽었소 하며 받아주었다.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다. 어머님 걱정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며 속없는 애처럼 편도 들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 정신력도 체력도 급격히 동이 났다. 날 향한 저주의 말들을, 혹여 흐트러져 보일까 허리 한 번 못 굽히고 앉아 경청까지 해야 한다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거듭되는 모진 말에 눈앞이 아득해지던 찰나, 엄마 아빠가 생각났고 내가 왜 이런 사람도 어른이라고 이 모욕을 당하면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을까 정신이 들었다.


"죄송한데 더는 못 있겠어서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서둘러 일어나는데 어디 어른 말하는데 일어서냐는 말이 가로막았다. 지금 예의를 따지시는 건가. 나한텐 1초도 갖춰준 적 없는 예의를 본인한텐 지키라고? 어이없었지만 나는 또 군말 없이 앉아드렸다. 그 길로 집에 갔다간 어른이고 뭐고 못 배운 애라며, 그 화살이 엄마 아빠를 향할 게 뻔해서였다.


"그래 어디 얘기 좀 해 봐" 어른 얘기 안 끝났다 하실 땐 언제고 왜 자꾸만 나더러 얘길 하라는 걸까. 대체 뭔 얘길? 무릎 꿇고 빌라는 건가? 눈물로 호소라도 해보란 거야? 정 그러시다면... 에라 모르겠다.


"저희 못 헤어지게 만든 건 어머님이세요. 어머님이 반대 안 하셨으면 오빠랑 저 적당히 연애하다 둘 문제로 헤어졌을 수도 있는 건데, 어머님이 세상 애틋하게 만드셨어요. 반대도 정도껏 하셔야죠. 어쩌자고 사람 숨통을 죄다 조이셨어요. 통금이 각서가 다 웬 말이에요. 근데 오빠가 저 만나겠다고 그걸 다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차까지 주셨다면서요. 근데 그 차도 오빠가 저 없인 싫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 사지 말고 그 돈 저한테 주시는 게 나을 뻔했어요. 저는 얼굴부터 복 없는 애니 돈 받고 정리했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 6월이에요 어머님. 저희 1월에 헤어졌는데 아직도 서로 못 놔서 이러고 있어요. 그동안 오빠 보셨죠? 친자식이면 애초에 반대도 안 했겠지만, 사람이 그렇게 술만 마시고 몸 다 망가지면서도 저여야 한다는데 친자식이었음 내 새끼 잘못될까 걱정되서라도 허락했을 거예요. 근데 어머님은 아니시네요. 그러니 어머님 남은 생 내내 오빠한테 친어머니처럼의 효도도 사랑도 못 받으실 거예요. 그건 본인 불찰이시니 저 원망 마세요"


라고 말했으면 뺨 맞았을까? 응... 맞았겠다... 할 말이 저렇게나 차고 넘쳤지만 눈 질끈 감고 삼켰다. 울기라도 하면 저 눈물로 남자 붙들어 앉혔다고 우길 사람이었고, 뭐라 말하면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독한 년이라 매도할 사람이니까 참는 게 이기는 거라며 이 악무는데, 쉴 틈도 없는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부모님 집은 자가니? 여동생도 고향에 부모님이랑 같이 있니? 여동생은 결혼했니? 생활비 보내드리니? 무슨 돈으로 생활하시니? 네가 맏이니 다 챙겨야지? 엄마 아빤 뭐라디? 헤어지지 말라디? 공무원이니까? 안정적이니 그 남자 잡으라 그러지? 너 나이도 있겠다, 지금 헤어지면 결혼 못 할까봐 어떻게든 잡고 보는 거잖아?


살다 살다 별...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도 아직 멀었구나. 드라마서도 본 적 없는 이런 어른이 왜 하필 내 앞에 있지? 울화가 치미려는데 웬걸, 숨 한 번 내쉬자 금세 무덤덤해졌다. 너무 말 같지 않은 말, 상처 주자고 작정한 말들이라 오히려 내 어디에도 생채기를 못 낸 것. 심지어는 그 어른이 딱해지기까지 했다. 저리 몹쓸 사람이라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 안 하셨구나 잠깐씩 그런 못된 생각을 하는 사이, 이 고행도 두 시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나 봐라 독하게 생겼지? 정? 안 들어. 니가 니 무덤 파는 거야. 근데도 해야겠으면 해 봐라 그 결혼"


뭐야 저 난데없는 결혼 허락은. 기쁘기는커녕 허탈했다. 사실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그 귀한 아드님과 헤어져드리겠다 말하고 싶어진 걸 누르던 참이었다. 어떻게든 큰 엄마 생각대로 안 굴어서, 결국은 허락 비슷한 말이라도 하게 해서 그 순간만이라도 저 어른에게 내가 겪은 절망과 지옥을 똑같이 돌려주겠노란 오기가, 남자 친구에 대한 사랑만큼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친정은 명절 두 번만 가. 일 그만두고 살림해. 1년에 제사는 일곱 번이고 너 오는 날로 난 살림에서 손 뗀다. 들어와 살고 차도 팔아. 너네 주제에 무슨 외제차. 니들한텐 돈 한 푼 못 주니까, 니 오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비며 뭐며 다 해. 건물 엘리베이터도 그 돈으로 내. 오빠 월급 300도 안 되는 거 알지? 할 수 있겠니?"


드디어 내 차례구나. 저기요 어머님, 안 하고 못 할 거 투성이지만 그래도 한다고 해야겠죠? 그래야 댁이 기가 막히실 테니까요.


"네 할 수 있어요. 대신 친정엔 명절 두 번, 엄마 아빠 생신 두 번 해서 일 년에 네 번 갈게요. 살림도 제사도 저 혼자 할 테니 처음에 가르쳐만 주세요. 그 차는 저도 불편하고 싫어요. 모든 건 오빠 월급으로 다 할게요. 근데 그럼 어머님 좋은 반찬 못 해드려요. 그건 이해해주세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놀라신 기색이 역력했다. 씁쓸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젊은 애들을 갈라놓든, 힘들게 같이 살게 하든 해서 본인이 얻으시는 게 대체 뭘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본인 생엔 더 한 게 오기 마련인 이치를 정말 모르실까? 천벌에 시차는 있어도 오차는 없다는, 겨우 36년 산 나도 아는 그걸 내 두 배를 사신 분이 대체 왜.


"니 말을 어떻게 믿어. 각서 쓰고 공증받을 거다"


아... 그놈에 각서 각서! 어디 각서로 성에 차시겠냐 내 혈서 써드릴 테니 그만 좀 하시란 말이 목구멍을 꽉 채웠다. 저렇게 무엇도 못 믿겠어 뭘로든 증거를 남겨놔야 하는 삶은 어떨까. 외롭겠지? 고단할 거야.


"하나 묻자. 내가 양자로 들인다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러대. 형님, 아무리 양자로 들이고 같이 살아도 결국 지네 친부모한테 기울 거고 더 잘할 건데, 그건 갸 며느리 자리도 똑같을 건데 뭐하러 그 재산 다 주면서 양자를 들이냐고. 나한테 받은 돈으로 지네 친부모 챙길 일 밖에 없다고. 천륜이 그렇다면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 하마터면 안아드릴 뻔했다. 그 모진 말을 쏟는 속도 결국은 자기 외로워지지 않을까가 걱정인 연약한 인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측은한 인생이었다. 남편도 떠나보내고 자식도 없는, 믿을 거라곤 시집와서부터 살고 있는 동네의 작은 건물 한 채와 자기 자신뿐인...?


응? 너 뭐하냐 지금...? 남자 친구 폰에 하트 붙은 이름으로 걸려오는 내 전화를 보곤, 또 그 계집이냐며 폰을 던진 사람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을, 니가 왜 이해하고 안쓰러워할 준비를 하지? 그러고 보니 누가 그랬는데, 남자 친구 세뇌당하지 않았겠냐고. 거긴 어쨌건 가족인데 그 어른이 결국 안 불쌍할 수가 있겠냐고. 그러게. 저 어른에게 된통 당하기만 한 나조차 그러려 하고 있는데 남자 친구는 그러고도 남았겠다.


"동네 분들 걱정도 맞죠. 근데 다른 여자면 모를까 저는 안 그래요. 제가 어머님 며느리 되겠다고 어떤 걸 겪었는데요. 결혼해서 집에 안 좋은 일 있으면 그거 다 제 탓 될 건데, 여자 잘못 들여 그렇다고 그 욕 제가 다 먹어야 할 텐데 저 그거 견딜 자신 없어요. 그래서 어머님한테 잘할 거예요. 자기한테 그 수모를 겪게 한 시엄마한테 잘하겠어? 하는 남들 보란 듯이 잘 모실 거예요. 어머님 때문이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일어나잔 말씀에 카페를 나왔다. 살기 어린 눈빛만 옅어졌을 뿐, 처음과 똑같은 공기였다. 택시를 잡아드리려 손을 뻗자 "저것도 손이라고. 저 작은 손으로 뭔 살림을 하겠다고. 아후 어디 하나 맘에 드는 게 있어야지" 신경이 타닥타닥 끊기는 느낌이었다.


"조심히 가세요"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눈길 한 번 안 주시곤 문을 닫았다. 내 맘을 알았는지, 다행히도 택시는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달리더니 빠르게 내 시야에서 사라져 줬다. 휴우, 고생했다 나 자신! 얼른 가서 눕자.


[다음 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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