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에서 이어짐]
| 불행은 더없이 행복할 때가 아니라 더이상은 힘들 수 없을 때 오고, 배신은 약속이 아닌 믿음을 나눈 사이에서 오며,
이별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희망이 없어서 온다.
하필이면 그 때 우린 그 삼박자를 굳이,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더는 못하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미친년이 돼 널을 뛰었다. 더는 못 하겠다라... 내가 오빠 하나만 보고, 어떤 걸 견디고 뭘 하겠다고 했는데 뭐? 기가 막히다가도 아니지, 나야 한 달도 안 됐지만 오빠는 1년을 넘게 매일을 그 지옥에 살았잖아. 안 지치고 어떻게 배겨가 돼버렸다.
진즉 왔어야 할 번아웃이었다. 여기까지의 모든 날이 고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보내온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기엔 지나갔다 보다는 견디고 버텼다는 말이 더 적합했다.
그에 비하면 나의 매일은 어땠던가. 순조롭고 제법 맑기까지 했다. 집에서야 무슨 난리가 나든 그걸 나한테까진 가져오지 않던 그 사람 덕분이었다. 제 속은 만신창이면서 나는 예쁜 것만 보게 하던, 내 지랄 맞은 성격을 단 한 번도 지랄로 상대하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큰엄마 때문에라도 절대 녹록지 않을 연애란 것도 죄다 까먹고 그에게 집중했던 건 그래서였다. 아무렴 공짜 없단 세상에 설마 내가 사귀는 사람이란 이유 하나로 그 온갖 걸 감수하겠다 했을까.
그의 약점은 다행히 내가 채울 수 있는 것들이었고 내게 모자란 부분은 감사하게도 그가 조금 더 가졌으니, 그런 우리 둘이라면 당장은 힘들지라도 멀리는 결국 행복할 거라는 하는 확신이 내겐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유미가 그렇듯 나 역시 내 세포들의 이야기... 마음과 머릿속에서 저런 반성과 성찰, 늦은 고백들이 분주히 이뤄진다는 걸 바깥에선 절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왜냐고?
"와, 오빠 진짜.. 쓰레기네..
제가 이렇게나 겉과 속이 다르니까요.
"넌 너만 생각하면 되지만 난 아니잖아. 나랑 큰엄마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 보면 죄스럽고 나랑 너 때문에 힘들어하는 큰엄마 보면 그건 그거대로 미치겠어. 너랑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지, 어떻게든 결혼만 하고 싶은 게 아냐. 큰엄마한테 미움 받으면서 종일 나만 기다릴 너 생각하면... 네가 왜 그래야 해. 지금 이렇게로는 우리 행복할 수 없어"
"갑자기? 새삼스럽게 뭘 그래? 이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다시 해보자고 했어? 이거 우리 인생 건 일이라 우리만 애타고 조급해. 큰엄마는 급할 게 전혀 없다고.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사실 갑자기는 아니었다. 큰엄마가 날 만난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였나. 사람이 꼭 1시간 전에 배달시킨, 근데 한창 바쁠 때 와서 한참 뒀다 나중에야 마시는 아메리카노 같아졌다.
HOT도 아니고 ICE도 아니고 맛있지도 않고 맛없는 것도 아닌. 분명 나만을 위해 새로 만든 건데 또 그렇게 깔끔하게 갖춰진 느낌은 없는. 거기 왜 있어? 하면 니가 주문했잖아! 할 것 같은, 있어야 하니 있는다는 그런 느낌. 사람이 멍한 게 텅 비어서는. 사람 불안하게. 사람 화나게 말이다.
화성 금성 그런 건 모르겠고 둘 다 똑같이 지구에서 만들어진 생명체요 인격체였지만, 우리는 달랐다.
나는 신속, 솔직했고 그는 신중, 우직했다. 내가 따발총이라면 그는 대포랄까. 그래서 그랬을까? 다 지나고 나니 이제야 보였다. 우리 사이 중대한 전환점엔 나 아닌 그의 결심이 있었다는 게.
1월. 언제 결혼하냔 내 물음에 자신도 확신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나는 두 번 생각도 않고 헤어지자고 했다. 헤어질 생각도, 헤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없이 한 말이었다. 어차피 그는 날 잡을 거고 나는 그냥 '오빠 더 노력해. 나 헤어지잔 말을 할 만큼 힘들어'만 알려주면 되는 거였으니까.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헤어지잔 내 말 뒤로 나를 풀어주고 달래주던 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질 않았고 그렇게 우린 헤어졌었다.
헤어지자한 건 나였으니 원인 제공과 책임 모두 내 것이어야 하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우리 이별에 주효했던 건 나의 이별 선언이 아닌 그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별하던 날까지 가려면 거쳐야 할 우여곡절이 많아 웬만하면 거기까진 안 가는데도, 이렇게 그날 얘기를 꺼낸 건 왠지 지금이 또 한 번의 전환점, 어쩜 종착점이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말하자면 지금은 더는 못 하겠다는 그의 결심이 펑-하고 터진, 전시상황이었다.
그래 그럴 때도 됐지. 다 알겠고 이해하는데 근데 그럼 나는? 난 안 지쳐? 결혼하자고 손 잡아 끌어놓고, 이젠 또 못 하겠다고 폼 잡으면 어쩌라고. 내가 나 모셔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부엌데기 들이는양 하는 집에 시집 가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내가 왜?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고 그놈이 그 놈인데?
나도 더는 못 해먹겠다!
나 그냥 다 때려치울까 봐.
"내가 오빠라면 집 나왔을 거야. 내가 다 괜찮다잖아. 가진 거 없어도 된다잖아. 그게 고생이든 불행이든 오빠 옆이면, 내가 같이 하겠다잖아. 근데 오빠는 자꾸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대. 현실적인 게 뭔데? 솔직해져 보자 우리. 오빠가 말하는 현실은 우리께 아니라 오빠 꺼 아냐? 나랑 가면 오빠가 불편해질 거 같으니까 그게 싫은 거잖아. 그럼 말을 해. 편하게 살고 싶다고. 너 땜에 포기할 수 있는 건 차까지지 건물까진 아니라고"
[다음 편에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