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상처 받은 시간만큼 상처 준 이의 수명이 짧아진다면

by 씀씀

[전 편에서 이어짐]


| 그런다면 조금은 편해질까.


내가 사랑한 그는 회사를 다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지금 내 나이일 때 공무원이 됐다. 크게 모아놓은 돈이 없었고 하위직 공무원 월급이란 모두가 알 듯 박했다.


남자 나이 마흔에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닦아두지 못 한 상황. 그게 그의 콤플렉스이자 지난 청춘에 대한 후회, 앞으로에 대한 불안이었다. 정년까지 열심히 모은다한들, 그것만으로 본인이 꿈꾸는 노후를 보내기란 어려울 테니까.


큰엄마는 그 걱정을 해소해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서울 옆 동네에 큰 규모는 아니어도 번듯한 건물을 가진,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였으니까. 훗날 그 건물은 당연히 큰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물려질 테고 그 자식이란 양자인 그였으니, 노후에 대한 그의 걱정은 해프닝으로 정리되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는 큰엄마의 가족이 되어주고 큰엄마는 그의 노후가 되어준다라.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하지만 늘 그렇듯 청개구리 인생이 하란대로 해줄 리 만무했고, 콧대 높은 삶 역시 짜은 계획을 순순히 따라주지 않았다.


인생의 그 짓궂음은 나를 별안간 그 남자 앞에 뚝 떨어뜨렸고, 그 파동에 모자 지간에는 균열이 생겼으니 그게 바로 이 대환장 파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1년 6개월. 지난하고도 요란한 시간을 지나 마침내 그 성대한 파티도 끝이 나려 했다.


연애가 그랬으니 끝도 보통과 다르기는 마찬가지. 우리 이별엔 기본이자 핵심인 헤어지잔 말조차 불필요했다. 그와 나는 이미, 줄곧 헤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생략된들 문제 될 게 없었다.


근데 또 사람이 간사해서, 그래도 명색이 이별이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데 거기다 우리 연애가 어떤 연애였는데! 하는 생각에 서러워, 이별만큼이라도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겠다며 온갖 말을 벌려놓고 고민도 해봤지만, 역시나 억지였다.


벌써 헤어져버린 연인에게 어울리는 이별의 말이란 하나같이 볼품없었다.


한 번 더 헤어지자.

다시 헤어져.

조금만 더 헤어져야겠다.


뭐를 붙여도 엉망진창. 지금도 충분히 안 좋은 끝에 굳이 저런 말들을 붙여 더 망가트릴 필요가 없었다.



식 차리지 않아도 되니 거추장스럽지 않다고 좋아해야 할지, 아님 맘도 휑한데 이별 장면도 이렇게 텅 비어야 하냐며 슬퍼해야 할지 분간이 안 됐다.


헤어지는 자리에 마주 보고 술잔 부딪히는 게 맞는 그림인지, 진짜 이 술 마시고 나면 우리가 영영 남인 건지. 그 거라면 이 집 술 내가 다 마셔야겠는데 한 시간에 한 잔씩. 그럼 몇 달을 여기서 안 일어나도 될 거니까. 근데 난 그럴 신세도 못 되겠네. 빌어먹을 영업제한... 그러니 속이야 어떻든 나는 10시가 되면 왕자님과 헤어져야만 하는 신데렐라. 유리구두 한 짝 남기지도 못 하고 파티장에서 떠나 줘야 하는 처량한 처지.


"나중에, 아주 나중이 되면 이렇게 헤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분명 들 거야. 그땐 나한테 고맙다고 할 거야 놓아줘서 고맙다고"


저 놈에 입을 진짜. 근데 저런 미운 말을 하는 얼굴이, 저 괴로워하는 얼굴이 어찌 저리 잘 생겼지? 저렇게 빛나도 되는 건가? 나 벌써 술이 취했나?


미용실에 갈 때면 꼭 그랬다. 분명 머리카락이 지저분해 정리한다며 간 길이었는데, 의자에 앉아 보는 거울 속 내 머리는 늘 본 중에 제일 예쁘고 난리였다. 도적마냥 부스스하던 컬은 세상 섹시했고 개털이라 부르자니 개한테도 미안할 지경으로 상했던 머리카락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매번 고민었다. 더 있다 자를까? 지금 너무 예쁘잖아?


그런데 지금, 술집에 앉아 그를 보는 일이 꼭 미용실에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더 만나면 안 될까? 지금 너무 좋잖아?




여기는 미용실이 아니고 내가 보는 건 상한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마음은 결국 내 것에서 내 것이 아닌 걸로 정리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이었니까.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마지막들은 항상 지금까지를 합친 그 이상으로 빛났다. 자꾸 마음에 밟히게 자꾸 아쉽게 자꾸 돌아가고 싶게.


내가 사랑한 그의 모든 게 오늘 유난히 빛을 발하는 것 역시, 헤어지기 싫은 내 마음이 투영됐기 때문이리라.


"더는 못하겠는 이유가 뭐야?"


"너도 일은 못 그만두겠다며. 그만두고 살 자신 있어? 살면? 우리가 행복할 거 같아? 나는 축복받는 결혼 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근데 우리 둘이 같이 가면 그 두 개가 다 안 되잖아"


"축복받는 결혼? 아무렴 오빠가 여자인 나만 할까. 축복, 행복. 난 거기까진 가지도 못 해. 일단 내가 꿈꾼 내 결혼엔 나를 반대한다는 일부터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둘이 같이 행복할 수 없으니까 각자 행복한 길 찾자는 거잖아. 그게 맞는 거잖아"


찰나였다. 소주잔을 들이부어야겠는 생각은 분명 속으로 한 거 같은데, 손엔 이미 비어진 소주잔이 들려있었다. 내 반응속도가 이렇게 빨랐나. 근데 그렇다고 해도 그걸 꼭 굳이 이렇게 확인해야만 했을까.


저질러놓고 이 화상은 또 머릿속이 뒤죽박죽인데 나보다 더 놀랐을 그는 평온했다. 소주 범벅이 되고도 뭐 하는 짓이냐 소리 한 번 안 높이는 그를 보자니, 왈칵 눈물이 터졌다.


맨 처음 어젠 잘 잤냐며 걱정하더니 갑자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며 지랄을 시작, 그러다가는 아까 이런 일이 있었다며 깔깔대는며 대화 좀 하는가 싶더니 냅다 소주잔을 들이붓는다라. 거기다 지금은 또 누가 보면 지가 소주 맞은 것처럼 기까지.


미친년도 이런 미친년이 없었다. 근데 미치지 않곤 배길 수도 없었다. 날 사랑하는 그 굴은 숨기지도 못 하면서, 아닌 척 이제 자긴 현실 택하겠다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겠냔 말이다.




잡자니, 일을 그만두고 큰엄마가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 집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큰엄마 언제고 돌아가시겠지. 그니까 미친 척하고 한 15년만 고생할까? 오빠랑 나 그다음에 못 한 거 다 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나에게 친구가 말하길


"너 카페에서 그 세 시간도 지옥이었다며. 정신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면서 15년을 그럴 수 있겠어? 열다섯 시간이 아니라 15년이야 15년"


노력할 것도 없이 듣는 순간 설득 당했다. 설득에 납득에 이해에 수긍에 세상 모든 받아들임은 다 할 수 있을 말이었다. 실 나는 그 때, 그러니까 그가 못 하겠다고 하기 전부터 이 사람과는 힘들겠다 생각 참이었기에 잡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랑 아침에도 싸우고 나왔어. 일 잘 하고 있는 애가 왜 나 하나 때문에 회사까지 그만둬야 하냐고. 내 월급으로 생활비며 건물 관리비까지 다 내라는 게 말이 되했더니 큰엄마 뭐래는 줄 알아? 그렇게 일이 하고 싶고 니 월급으로 사는 게 말이 안 되면 어와 살다가 여기 집 앞 슈퍼 캐셔하래. 사람이 할 소리냐 그게. 내가 너한테 너무 면목이 없어"


인간이... 이렇게도 사악할 수가 있구나. 소주잔은 내 앞에 이 남자가 아니라 큰엄마 아니 그 독사 같은 여자한테 들이부었어야 할 일이었구나.


어쩌지. 나 그 여자한테 어떻게든 이겨야겠는데. 내가 받은 상처만큼은 못 돼도 그 여자 가슴에 흠집이라도 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다음 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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