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취중진담: 취중에 '듣는' 진담

by 씀씀

[전 편에서 이어짐]


| 행선지를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봐야 하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딜 가나 영업제한. 나 하나 위해 문 열고 기다 곳은 없었고, 있다고 한들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진 마당에 그리 갈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다.


그냥 집에 얼른 가고 싶다. 가야겠다. 내가 무얼 하든 아무도 모를, 세상 가장 덜 쪽 팔린 곳에 가서 화장이 망가지든 말든 콧물을 흘리든 삼키든 상관 않고 흠씬 울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였다.


그날 새벽은 운이 좋았다. 맘에도 없는 이별을 하고 온 나를 하늘 위 누군가 갸륵히 봐주셨나. 원래대로라면 평소보다도 더 하얗게 지새고도 남았을 밤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취를 감추려 했다. 불면증 말기 환자에게 이토록 졸음이 쏟아지는 건 아마 치사량 수준으로 울어재낀 울음 덕이리라.


지금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잠 너 밖에 없단다. 그러니 사양 말고 오렴.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오래오래 머물다 가려무나.


외로움이 길어지면 벽과 얘길 한다던데, 밤이 길어진 나의 말동무는 잠이었다. 웬일로 잠과의 대화도 수월하니 서둘러 밤 셔터를 내리려 하는데 올 손님이 남아있었나 보다.


왔다가도 돌아갈 새벽에 이런 문전성시라니. 야심한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이 얼마나 무섭고 언짢은 일인가!는 무슨... 인터폰을 보곤 버선발로 달려 나갈 뻔한 걸 겨우 무릎 꺾어 앉혔두었다.


인터폰 화면엔 아까 본 그 빛나는 얼굴이 있었다. 보나 마나 나와 헤어진 그 길로, 혼자 사는 후배 집에 갔을 것이고 거기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셨을 터. 참다 참다 못 참고 보고 싶어 왔을 것이고 헤어지기 싫어 왔을 것이고 그냥, 무조건 가야 할 거 같아서 온 길이었을 것이다.


열어줄 때까지 안 가고 서있을 사람이니, 그럼 그냥 혼자 계단에 쭈그려 앉아 고생하다 가라고 내버려 두면 될 것인데 나는 또 그럴 위인이 못 됐다. 우리가 그 사연들을 다 차치하면서 여기까지 온 데에는 진한 건지 징한 건지 모를 사랑도 분명 있었지만, 둘 다 너무 멍청하고 물러 터져서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뭐, 그렇게 사랑한 것도 그랬으니 가능 거겠지만.




"다신 보지 말자고, 평생 안 볼 것처럼 가더니 문은 열어주네"


이것 봐. 역시 멍청해. 다신 보지 말자고 한 여자가 언제 전화오나 왜 안 오나, 정말 안 오면 어떡하지? 속 다 태워가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을까. 열길 물속보다 어려운 게 한 길 사람 속이고 그 속보다 아리까리한 게 길이 났는지 어쨋는지도 모르는 여자 속이라지만,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여잔데. 자기 여자어 못 알아채기로는 이 남자가 세계 으뜸 이리라.


맥주 사 왔다며 한 잔 더 하자는 그는, 가방을 열더니 부침개를 꺼냈다. 아니 부침개가 왜 거기서 나와...


"갔더니 용호가 전이랑 시키더라고.이거 좋아하잖아. 부침개에 밥 먹으면 맛있다고 잘 먹잖아. 아까 안주 먹지도 못 하던데 얼른 먹어. 왜 우리 얼마 안 됐을 때, 막걸리 먹으러 가서 갑자기 공깃밥 시키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게. 나 이래서 비 오는 날 막걸리 집은 가겠냐. 전 먹을 때마다 네 생각나서 어디 먹겠어. 겨우 전 갖고도 이러는데 나는 너 만나기 전으로 이제 못 돌아가"


지금 이걸 먹으면 이게 그 유명한 눈물의 빈대떡이 되는 건가. 부침개를 먹었다간 코로 들어갈 일이기에 맥주고 전이고 다 먹기 싫다 더니, 일장연설이 시작됐다.


너는 이거 먹기가 싫으냐 나는 너랑 헤어지기가 싫으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너랑 헤어지면 내가 잘 살 거 같냐, 난 지금도 망가졌고 앞으론 더 할 거다, 너한테 이렇게 상처를 줬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그걸 다 알면서 어떻게 잘 살겠냐, 다 그만두고 너랑 어디 시골 내려가서 둘만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김동률이 하는 취중진담은 세상 감미롭고 달콤했는데 왜 이 남자의 취중진담은 이토록 가슴 저릿하고 괴로운 걸까.


"오빠 혼자 마셔. 앞에 앉아 있을게"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아침을 맞았다. 얼큰히 취해 와서는 또 맥주를 마셨으니 분명 제정신일 리 없을 텐데, 신기하게 대화가 다 되니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 아까 그 술집인가 싶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술이 암만 돼도 모든 대화가 능했다. 헤어진 1월부터 세상 술 다 마실 것처럼 술독에 빠져 지낸 그의 매일을 봐왔으니, 음 행동들도 이미 아는 터였다.


술이 깨면 먼저 미안해 할 거였다. 찾아온 걸, 헤어지기 싫은데 헤어져야만 하는 걸, 헤어져야 한다면서 못 놓는 제 마음이라는 걸.


그다음엔 간밤의 대화란 그의 기억에 없을 거였다. 그러니 이젠 내 차례였다. 어차피 기억 못 할 거니까 내 마음 하나 정도 터놓고 얘기한들 아무 문제 아니리라.


취중진담을 꼭 하라는 법만 있나. 가끔은 들어주기도 하는 거지. 취중에 하는 진담 말고 취중에 듣는 진담.


그러니 술 취한 오빠, 지금 내 말 잘 들어. 대신 내일 되면 기억은 안 하는 야. 약속한 거다?


"오빠, 우리 여행 가자"


[다음 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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