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랑이 사고면 이별은 사건인 법. 미제 또는 종결

by 씀씀

[전 편에서 이어짐]


| 어차피 헤어질 거면서 여행을 뭐하러? 얘기를 들은 친구 몇의 반응은 이번에도 한 사람마냥 같았다. 이것들이 나 몰래 회의라도 하나 의심을 하기엔, 그 친구들 간에 공통분모는 내가 유일했으니 그건 또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일반적으로든 상식적으로든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된다는 소리겠지.


헤어졌는데 그리고 또 헤어질 거면서 무슨 여행을 가냔 말은, 유명한 죽을 거면서 뭐하러 사냐는 말과 같았다. 뭐 그러는 남들은 퍽 상식적으로 살아서 살찔 거 알고 먹어놓곤 살쪘다고 툴툴대나? 취해도 괜찮으니 마시는 거면서 오늘은 안 취하겠다고 다짐씩이나 해?


길어야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이었다. 36년에 절반은 남들 눈치 보고 신경 쓰고, 그 등살에 치이면서 산 거 같으니 5일 정도는 내 맘대로 살아도 괜찮을 일이었다.


뭐를 입을지가 고민이던 나에 비해 그의 여행 준비는 골치 아팠다. 무려 4일을 집 떠나 여행을 가겠다 했으니, 그 독한 여자가 가만 있을리 없을 거란 건 예상했던 바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기 전에는 그 계집이랑 가는 거 아니냐며 수상해했고 여행 중에는 전화로 그 낌새를 차리려 안간힘이었으며, 다녀와서는 친구들이랑 다녀온 사진을 보여달라 했단다. 까운 재능이었다. 정도 추리력과 집중력이면 흥신소가 딱인 것을 왜 집에서 그러고 있대.


사귈 때도 제대로 못 가본 여행을 헤어지고 가다니. 여행은 그게 뭐든 신나고 들뜨는 건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도 예외가 있었다.


떠나기 하루 전, 꼭 어린 시절의 소풍 전날처럼 밤을 꼬박 샜다. 불면은 똑같았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떠날 여행이 설레서가 아니라 슬퍼서 못 잔 적은 날이 처음이었다.




4박 5일은,

눈 깜짝할 새라고 할 만큼 짧는 않았고, 너무 금방이라 5일이 5시간 같았다기엔 분명 그보다 길었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길 바라기엔 모든 순간이 애틋하여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달라하기 힘들게,

그렇게 지나갔다.


-손모아 님이 추억 +100을 획득하셨습니다.

-손모아 님이 방어력 -1000을 상실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전력손실이 엄청났다.


원래도 힘든 이별에 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이제부턴 본격적로(도대체 몇 번째 본격적...) 죽어라 힘면 될 차례였다.


졸업, 신혼, 우정, 효도… 별별 여행이 다 있는 세상에 왜 이별여행은 흥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사람들이 안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하지만 다 알고도 떠났던 길. 가서도 힘들고 다녀와선 더 힘들 거란 걸 알았지만 가야만 했다. 헤어지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좋을 수 있을 때, 그와 내가 닿아 있을 때 마냥 좋고 싶었다.


꼭 '우리'가 그와 내 자식이기라도 한 것처럼, 맛있는 것도 먹이고 바람도 쐬멋진 데도 데리고 가면서,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만 직살나게 한 우리 연애한테 말 너무 미안했다.




다시 돌아온 서울. 공항에서 우린 헤어졌다.


"빠, 우리 여기서부터는 각자 가자"


아무리 공항이 만남과 이별의 장소라지만, 그 이별이 이런 식은 아닐 텐데. 남들 해 본 건 많이 못 해봤으면서 남들 안 하는 건 많이도 해보니 떤 면에선 그래도 훌륭한 시간이었다고 야 할까.


딱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맞춰 온 잘 들어갔냐는 그의 연락을 나는 죽을힘 다해 씹었다. 얼마 후 오는 전화는 죽었다 생각하며 씹었고, 그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걱정된다며 답이라도 해달라며 오는 그의 연락은 난 이제 그에게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며 씹었다. 씹고 씹고 또 씹는데, 갑자기 그날 생각이 났다.


헤어지자면서는 나를 못 놓고 맴도는 그에게 몹시 화가 났던 어느 금요일, 조퇴를 하고 무작정 그에게 갔다. 큰엄마에 대한 분노와 원망까지 모두 그를 향하던 때. 그 쪽으로 가는 중이니 문자 하면 나오라는 말만 전하곤 그의 회사에 도착했다. 내려오라는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그는 내 눈 앞에 서있었다.


"나 오빠 뺨 때리러 왔어. 마스크 좀 벗어봐"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날을 떠올리며 이걸 적는 지금도 내가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뭔 생각으로 마스크를 벗어보라 한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 바보 같은 놈은 뭐 하나 묻지도 않고, 왜 이러냐 말리지도 않고 마스크를 벗다.


사람 뺨은 어떻게 때리는 건지 어깨 넘어 본 것도 없으면서, 뭐에 홀린 듯 오른손을 올려 그의 뺨 내렸는데, 중했다. 것도 황스러울만치 지나치게.


그 넋 나간 표정과 부은 뺨을 보는 일이 어찌나 아프던지. 내 손이 이렇게나 얼얼한데 저 사람은 얼마나 아플까. 좋은 거라고 이렇게 처음부터 잘 버릴 일인가 이게? 사랑하는 남자 싸대기를 때리는 일을? 굳이?


간다는 말도 없이 그 길로 돌아섰다. 그리곤 집에 오는 내내 울었다. 울다 울다 진이 빠져 우는 것도 못 하겠다 싶던 찰나, 더한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그에게 온 문자 때문이었다.


-손은 안 아파?


씨... 바보 같은 게... 세상 멍청해갖고... 이렇게 착해서 나를 어떻게 버리겠다고.


별안간 떠오른 그날의 기억에 몇 번을 씹은 건지도 모를 그의 연락에 답을 보냈다.


-4박 5일 즐거웠어. 잘 살라는 말은 역시나 못 해. 아프지는 마. 나도 그럴게


도통 나를 놓질 못 하니 내가 그를 놔줘야 했다. 먼저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여행 가기 전 봐 뒀던 집으로 서둘러 이사를 했다.


이제 그를 나에게 닿게 하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신기루처럼 자기 인생에서 사라지는 거냐던, 내게 온 그의 마지막 말은 결국 질문이 아니라 답이 되었다.


[다음 편이 드디어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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