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큐즈미, 신혼여행 왔습니다 10
안네 프랑크 할머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당신의 일기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 일기라는 일종의 가장 은밀한 고백을 전 세계가 보게 될 줄. 후대에 후대를 거듭하며 남겨질 것과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게 되리란 것까지 그 어느 하나 말이다.
나의 쓰기란 무릇 에세이 형식을 취하나, 완벽히 부합한다 생각진 않는다. 정해 놓은 종류에 내 것을 포함시켜야 하는 선택은 언제나 불편하고 답답한 일이니, 어디에도 척하니 걸맞은 게 없기에 그럴 거다. 이제는 문학 장르에 ‘의식의 흐름‘ 같은 탈정형화, 탈규율화 된 새로운 알파가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암만 그런들 세상이 정한 답안에 내 것을 적용시켜야만 쓸 수라도 있는 일. 굳이 굳이 나의 쓰기에 적합한 형태라면 일기를 꼽으니. 일기란 철저히 혼자만의 글이니 지킬 규칙이라던가 조심할 내용이란 없다는. 쓰는 피로도만큼은 제일 적은 장르인 것 같아 그렇다.
‘내 글은 결국 일기‘라는 빌드업이 (강한 자가 지 중심으로 서술한 편집적 역사가 아니라) 아주 보통의 사람이 날 것 그대로 적은 세계사여서 더 힘과 가치 있는 안네 할머님의 그것과 ‘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에 도달하기 위한 파렴치한 전략이었냐. 물론 아니다. 그럼 안네의 일기가 그랬듯 내 일기 역시 후에는 어찌 될지 모르네 하는 미친 소리냐. 그럴 리가. 물론 아니다.
그저 자물쇠 채우는 비밀 일기장이 아닌 브런치라는 열린 노트에 남긴다는 차이일 뿐. 나의 일기 역시 사적이고 사소한 하루 잔상에 대한 감상이라는 데에서는 그와 동일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왜냐면 그 내용이 나를 향한 이러쿵 저러쿵이면 상관 없겠으나, 내가 현재 꽤 격렬하고 성실히 쓰는 신혼여행 리뷰가 어쨌건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영향력 1도 없는 우주 먼지라는 인지는 이미 마쳤만, 워낙 걱정충이라 이런 것까지 우려하는. 인생 참 피곤하게 사는 타입인 걸 어쩌겠는가. 그 덕에 쓸 거리 하나 생긴 거니 그 점에선 약간 땡큐.
가본 나라라고는 여섯 국가. 그마저도 일본, 태국, 베트남, 대만에 이번에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튀르키예와 이집트가 힘을 보태준 덕에 다섯 손가락을 벗어났다.
여권에는 어떤 찍힘도 당하지 못한 순수 종이가 더 많고, 상식과 지식에 역시 외국에 대해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상황. 흥선대원군이 살아 계셨다면 여러모로 참 마음에 들어 하셨을 사람인 나 자신.
세상 좋아져, 직접 가지 않아도 검색과 플레이 한 번이면 못 가볼 나라와 알지 못할 다른 나라 이야기가 없음은 안다. 헌데 그런 게 워낙 많다는 것이 내게는 또 문제니. 선택이 어려워 그것을 취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는 게으름. 또 접한들 내 것을 못 만드는 암기력, 이해력 부족 등에. 외국을 저장하는 방법이, 북마크 아닌 밑줄 쫙이어서 방구석 전문가로도 등극 못 하는 신세.
분야 막론 고대부터 전문가는 있어 온 터. 여행도 외국도 경험, 지식, 감각 등을 밑천 삼고 무기 만들어 업으로 삼는 이들이 계신 시대인지라.
단편적이고 편협한. 내 사소하고 솔직할 생각들을 게워내는 와중, 새삼 걱정되니. 뭣 모르는 비전문가의 오만한 ‘척'으로 비칠까 하는 염려보다는, 다녀온 나라에 대한 미천한 경험 말곤 없는. 무지한 상태로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송스러움에 마음이 거북하다.
그렇다면서도 또 굳세어라 쓰는 것은, 같은 재료와 레시피로 음식을 해도 만드는 이에 따라 맛이 다르고 먹는 사람마다 만족도가 다른 것에 기인한다. 나라가 재료면 여행은 레시피고, 그 경험은 타인의 취향인 것이니 말이다.
나는 쓰는 일을 사랑한다. 하여 아낀다. 그러니 무작위로 무지성으로 쓰지 않는다. 씀으로써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쓰는 똥고집이 굳건해, 쓰는 걸 좋아하는 크기를 생각하면 쓰는 개수는 적은 편. 근데 그 부분에서 이번 신혼여행이 큰 역할을 해주니. 누가 보면 대작가가 작품 활동 영감 받으러 간 여행인 줄 알겠다.
어느 나라든 활력과 무기력이 있다.
여행자에게 낯선 땅의 활기란 생소한 반가움이라기보단, 낯설어 지레 겁먹는 불편한 생기일 수 있구나 느꼈다.
그럼 도시의 무기력 앞에선 생기 넘치느냐? 아니. 연고도 없는 땅. 완벽한 타인들의 무력감은 우리나라에서도 안 갖던 고민과 상념을 만드니 마음이 뻐근한 걸로 모자라 까딱, 국제 정세로까지 뻗어 나간다. 안에선 새도 밖에선 새지 말아야 하는데 내 주책 바가지.
눈처럼 글도 마음의 창. 나의 씀이 그걸 대변하는 것 같다. 활력과 무기력이 무작위로 교차하는 이 카오스적인 글쓰기. 근데 어이 없게 이 산만함이 반갑기도 하니. 그건 이 정신없음이 이해되고 배려받는 나이가 아니어서 그런 듯하다. 나이 마흔에 어디 가서 이런 산만을 떨면, 그동안 내가 보여준 집중과 차분은 새까맣게 잊히고 이 찰나의 어수선만 조명을 받는다. 물론 이런 나 역시도, 타인의 오두방정에 바느질할 때 마냥 꼼꼼하고 치밀하게 세모눈 뜰 지 모를 일이지만. 아니 그럴 거다.
나나 남이나 살기가 그렇게나 지랄맞다. 그러니 쓰기만큼은 네댓 살 어린애처럼 흙도 묻히고 코도 흘리면서 자유롭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그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