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첫사랑 연금이라도 있답니까

익스큐즈미, 신혼여행 왔습니다 9

by 씀씀


나는 결혼이 늦었다. 요즘 시대에 만혼으로 분류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른 결혼은 아니다. 친구 그룹에서 여자 중 내가 막차를 탄 대목만 봐도 그렇다.


친구들은 일찍이 가정을 꾸렸다. 대부분 서른 전 면사포를 썼고 남은 몇몇도 서른다섯을 넘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비혼 친구도 서른일곱에 짝을 만나 떠났으니. 내 결혼 소식에 나보다 감개무량해 하던 그 마음을 영 모르겠는 바도 아니다.


대체 춘추 몇에 하는 혼인이기에 그러느냐 하신다면. 그러니까 내 나이란. 어디 회원 정보 입력할 때 출생 연도 찾으려면 스크롤을 하안참 내려야 하는 신세인 것으로 1986년생. 괜히 사람 구차해지는 표현을 쓰자면 '한국' 나이로 40세겠고 새로 얻은, 심폐소생술한 나이로는 39세이며 내가 가진 숫자 중 제일 적음에도 말할 때는 제일 초라한 '만' 나이는 38세.


이렇듯 산 세월이 얼만데. 신랑 된 남자가 첫 연애일 리는 당연히 만무한 상황. 그렇다고 첫사랑이기도 힘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립서비스로라도 연애는 했지만 사랑은 당신이 처음이야! 한다면, 어이없음에 한 번 웃기라도 하는 콘텐츠가 되겠지만 놉. 절대. 아닌 건 아닌 거. 그런 오그라드는, 내 귀한 손발의 안전을 걸고 하는 위험한 거짓말은 할 이유가 없는 거.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있는 그대로는 굳이 돌아이처럼 피곤하게 사는 나는, 남편이 남자친구던 시절에도 이전 연애에 관해 말할 일이 있으면 숨기지 않았으니. 뭐 이런 애가 있나 싶어 하던 남자친구의 토끼 눈이 여태 선명하다.


예를 들어 엑스와 갔던 식당에 남자친구와 가게 되는 상황. 나 여기 전에 만나던 사람이랑 왔었어! 그때는 맛이 어땠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하는 게 나 자신이면,


이렇게까지 솔직해야 해? 그냥 친구랑 갔었다 해도 되잖아라는 게 그의 입장이었달까. 그 사람이랑 간 곳을 굳이 가고 싶지 않다는. 그때가 떠오를 거 아니냐는.


거기에 나란 놈. 시종일관 적반하장 유분수를 고수하니.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 해? 내가 그전 연애를 오래 한 것도, 그때도 이 동네 살았단 것도 알잖아. 그럼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이랑 갔었다는 거 역시 이미 알 텐데 왜 속여? 그 사람이랑 가 본 게 뭐가 중요한 지 모르겠네. 나한텐 너랑 처음 간다는 게 의미 있어. 까먹힌 기억이 아니니 그땐 이랬는데 바꼈네 생각은 하겠지만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거. 그 위에 다른 장면들이 얹어지는 게 더 큰 사건이야라는 식.


남자친구의 당황함을 나는 이해했다. 쿨함인지 별종인지 모를 내 모습은 친구들도 어이 없어하던 것. 어디가 잘못된 건지 나는 옛날부터, 이성 문제에 대해 질투나 그 비슷한 동요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신 있었고 만나는 사람을 믿었다. 확인할 수 없는 일을 의심해 봤자, 나는 정신병자가 되고 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겼으며,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면 결국엔 드러난단 생각이 확고했다. 과거 역시, 암만 용을 써봤자 응 넌 옛날. 예기치 않게 애인의 전 연애를 마주하면, 시기나 두려움보단 오히려 궁금했고 상대를 더 배운 것 같아 변태마냥 뿌듯했다. 그리고 바빴다. 이 사람의 모든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을 전임자 자리에 하나씩 가서 앉으려면, 질투 같은 건 세상 팔자 좋은 소리였다.


전 연애사에 대한 옥신각신은 끝내 나의 승리. 라기보다는 남자친구의 포기. 라기보다는 남자친구의 무념무상으로 종결됐다. 과거사를 언급함에 있어 내가 그리움이나 후회, 미련 등등의 열린 감정이 전혀 없음을 그가 인지한 덕분이었다. 거봐, 나 악의 없다니까?


내가 남편을 만난 내 나이상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연애도 사랑도 우리 동네 맛집도 다 남편과 처음이었다면 얼마나 운명이고 행복이었겠냐만, 그럴 순 없던 중. 다행히 이 나이 먹도록 남자와 하기로는 남편이 처음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결혼' 생각하시면, 많이 섭섭합니다. 너무 뻔한 전개잖아요.


여기서부터는 무얼 어떻게 쓰든, 꺼내는 단어와 이어지는 대화. 그 문장만으로도 바로 결말이자 정답이기에 애꿎을 노동이 될 빌드업 없이 go. 첫 연애도 첫사랑도 아닌 남편이 4년 전. 당시도 적지 않은 나이였던 나에게 무려 첫 남자가 된 영역은 비행기와 해외여행.


첫 해외여행은 남자친구와 가겠어!


언제 어떻게 생성된 개똥철학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대 도중이던 것만 확실한 상황. 친구도 남자도 물건도, 한 번 사귀면 연을 오래 가져가는 나는 20대에 4년, 3년. 두 번의 연애를 했지만 먼 거리 떠나본 적은 없었다.


헤어졌으나 둘 모두 당시의 내가 열심히 아끼고 좋아한 사람들. 그런 그들과도 가지 못하고 간 적 없던 해외가 됐기에. 그래, 결심했어! 나의 첫 해외여행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때 가겠어! 고집 부리자 마음먹었고 생길지 안 생길지, 언제 생길지도 모를 상대를 생각하며 혼자만의 순결을 지켜나갔다.


그리고 2018년. 내 나이 서른셋. 순결은 깨졌으니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한 파괴였다.


지금 생각하면 꼭 그때만은 아니었을 텐데. 당시 내 귀는 그게 자극이었나보다. 회사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면 심심찮게 등장했던 소재가 딱 그맘때 내게 유효타를 날렸으니 그건 다름아닌 유학담이나 해외여행담. 아마도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다. 혹시 해외 어디 가봤냐, 어디가 좋았냐 하는 류의 질문이 나에게 올까 불안해하는 마음을 자각하게 됐고, 나가본 적 없다고 말하기가 겸연쩍다기보단 나가보지 않은 이유까지 들어줄 이유도, 여유도 없을 그 분위기와 내 대답에 무어라 생각할까 걱정하는 나의 스트레스가 괴로웠다.


그즈음 친구와 술 한 잔 하던 날. 위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물 만난 고기가 된 친구가 말을 끊었다.


"안 그래도 말 할라 했어. 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너를 이상하게 볼 거야. 뭔 똥고집이야? 다음에 만나는 남자랑도 상황 안 돼서 못 가면, 언제 가보게? 다음 달이다. 나랑 가. 지르고 봐. 뭐 어디 우주선 타래? 달나라 가냐?“


저… 저기… 그러는 너도 다녀온 해외라고는 한 곳. 그것도 출장이던 애 아니니? 이건 지가 가고 싶어서 날 이용하는 걸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너를 내가 어떻게 이기냐는 듯, 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순응했다. 첫 해외여행은 반드시 남자친구와 가겠다는 철벽 지조는 그날 비행기를 예매함으로써 우아하게 박살 났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영광이 있었으니. 그 후로 해외를 더 나가고 비행기를 더 탔어도, 그리고 자그마치 그 사이 3년의 연애를 했음에도. ‘남자'와 비행기를 탄 적은, 남자와 '해외여행'은 떠난 적이 없다는 것!


이번 신혼여행은 구 남자 친구. 현 남편과의 다섯 번째 해외여행. 스스로도 영문을 몰랐던 내 개똥철학은 서른 여섯,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뤘고. 질투 많은 한 남자에게 본인만이 온전하게 차지한 한 영역과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한 것은 물론, 생각지 못한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탈, '마지막' 해외여행을 함께 하는 남자까지 되는 해피엔딩을 예고하게 됐다.


내 여권은 찍힘을 당한 면보다 빳빳한 종이가 여전히 더 많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다. 부부가 됐으니 생겨난 책임만큼, 현실의 무게도 더 빡셀 테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신혼여행을 곱씹으며 현실세계를 뿌셔야겠지만, 내 나이 몇 살 때 어느 나라로 며칠을 가게 되든 그때에도 우리 부부가 탄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했으면 좋겠다. 또 안전히 착륙하고 말이다.


아직 혼인 신고도 안 하고 마련한 내 집도 없는 지금. 나와 이 남자가 똑같이 나눠 가진 도장은 여권에 찍힌 스탬프뿐. 누군가는 가난한 신혼부부라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사실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내가 그 똥고집을 참 잘 부렸구나 싶은 게, 나 자신 참 기특하다.


이걸 쓰는 내내, 나는 남편의 몇 번째 여자친구였는지 등등은 한 번도 안 궁금했다는 게 지금 생각났다. 사람 참 한결같군. 앞으로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안물안궁. 아내는 나인데? 복 받은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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